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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9월 6일, 한석진(韓錫晋, 1868-1939) 출생. "선교사들이 귀국하든지, 주님 앞으로 가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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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6일 “한석진, 내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굳이 외국인에게 급여를 받을 이유가 없다.” 


오늘은 한석진(韓錫晋, 1868-1939)이 출생한 날입니다. 1868년 9월 6일, 한석진은 평북 의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상륜(徐相崙)에게 복음을 듣고, 1891년에 마포삼열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마포삼열의 조사로서 평양선교를 하던 중 체포되어 큰 고초(苦楚)를 겪었습니다. 한석진은 1907년에 평양신학교를 1회로 졸업한 후, 한국장로교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명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는 1909년에 일본 동경에 파견되어 이수정에 의해 세워진 신앙공동체가 교회로 세워질 수 있도록 기초를 잡아주었습니다. 또한 서울 안동교회에서 목회할 당시, 남녀의 자리를 갈라놓는 휘장을 철폐했습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예배당 안의 휘장을 철폐한 이 일은 매우 진보적인 결단이었으나, 한석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됨을 강조하며 출입문도 하나로 통일했습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6대 총회장을 맡기도 했던 한석진은 한국적 교회 설립을 위해 애쓴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선교사들이 귀국하든지, 주님 앞으로 가든지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905년 평양신학생과 교수 일동의 기념촬영에서 제일 앞쪽의 중앙에 길선주와 한석진이 앉아 있는데, 전자는 성경을, 후자는 태극기를 각각 손에 들고 있었다. 이는 기독교의 복음과 조선민족의 자주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실제로 한석진의 경우는 한말에 독립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웠고, 한국교회의 민족교회화에 노력하였다. 그는 1906년 공의회에서 총대 이외의 방청인으로 참석한 한국장로들에게까지 발언권을 주도록 하였다. 또한 1925년……에 개최된 조선기독교봉역자회의에서 한석진은 마포삼열・에비스・게일 등 원로목사들에게 선교 산업의 성공을 위하여 선교사들이 한 나라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지 말 것을 지적하였다. 즉, 교회의 기초가 서면 그 사업을 원주민에게 맡기고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이며, 한 지역에 오래 머물러서 우월감과 영도권을 행사하고자하는 문제점을 제기하였다.[유준기, 『한국민족운동과 종교 활동』 (서울: 국학자료원, 2002), 150.]

한석진은 음주와 흡연 문제에서 자유로운 교역자였습니다. 그러나 자립의 원칙에 충실했던 그의 정신은 마땅히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마포삼열이 건네는 조사 사례비를 거절했습니다. 내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굳이 외국인에게 급여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석진이 외국의 원조를 바라지 않고 교인들과 힘을 모아 널다리골 교회를 지은 것은 아름다운 신앙의 자태(姿態)입니다. 한석진 목사의 폭넓음과 굳센 의지가 말만 많은 내게도 있는지 돌아봅니다.

한석진 목사의 에큐메니컬 지도력은……‘금강산 기독교수양관’ 건축에서도 발휘되었다. 이 수양관은 장로교 총회의 결정과 주관 아래 모금되었고 건축되었다. 따라서 그 수양관의 공식 명칭은 당연히 ‘장로교 수양관’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한석진 목사는 이 수양관이 장로교회뿐 아니라 우리 교회로서 주께 영광 돌릴 만한 일에는 교파와 교단을 불문하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며 초교파적인, 명실 공히 한국 기독교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그의 희생과 헌신의 결과로 이루어진 수양관이어서 한석진의 뜻이 받아들여졌다.[정성한, “한석진 목사의 목회 리더십”, 『장로교 최초 목사 7인 리더십』 (서울: 쿰란출판사, 2010), 1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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