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7일 “엘리자베스 1세, 중용(via media)”
오늘은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가 태어난 날입니다. 1533년 9월 7일, 엘리자베스는 그리니치(Greenwich)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국왕 헨리 8세, 어머니는 앤 불린(Anne Boleyn)이었습니다. 헨리 8세는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로마교와 단절하고 명목상의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25세에 여왕의 자리에 올라 45년간 통치한 엘리자베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영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통치기를 황금시대(Golden Ag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엘리자베스1세의 대표적인 통치방법은 중도정책이었습니다. 이는 개신교와 로마교의 혼합을 의미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신교도였다. 왜냐하면 엘리자베스가 카톨릭을 신봉했다면 자신의 적법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왕좌에 대한 권리까지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영국 왕좌에 대한 카톨릭의 권리 요구자는 메리 튜더(Mary Tudor)의 손녀이며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에게 존재하게 된다. 약삭빠르고 실제적이고 매우 총명한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권력에 머물고자 할 때 취해야 하는 유일한 선택의 여지는 신교 체제 내에서의 중도적 신앙 자세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편으로 엘리자베스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를 요구할 것 같은 자신의 카톨릭 신자 백성들의 감정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자신을 지지하는 개혁자들을 완전히 소외시킬 입장도 못되었다. 그 결과는 아마도 만족할 수 없었을 중용(via media), 또는 엘리자베스 결정(Elizabethan Settlement) 등으로 다양하게 알려지는 신앙적 타협이었다.[Allen Carden, Puritan Christianity in America, 박영호 역, 『청교도 정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18.]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피우스 5세는 엘리자베스를 칼빈주의자로 정죄하며 파문했고 그녀의 폐위를 선포했습니다. 로마교의 눈에 그녀는 너무나 종교개혁적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어와 라틴어,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던 여왕의 중도정책은 종교개혁을 꿈꾸는 이들의 눈에 너무나 로마교적으로 비쳐졌습니다. 1560년대에 이러한 불만을 표시한 사람들은 청교도라 불렸습니다. 윌리엄 퍼킨스와 토머스 카트라이트와 같은 청교도들은 미완의 종교개혁의 완성을 촉구했습니다. 거룩한 불만 속에서 설교하고 글을 쓰며, 양떼들을 돌보았던 청교도들을 생각해 봅니다. 결코 쉽지 않았을 그들의 싸움이 건강한 교회를 꿈꾸는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엘리자베스는 가톨릭주의와 칼빈주의라는 양 극단을 정치적인 유에서 거부했다. 가톨릭주의는 그녀의 정당성을 부인했고, 칼빈주의는 그녀가 군주제를 뒷받침한다고 믿었던 감독 제도를 반대했다……제임스 1세가 간결하게 선언했듯이, “주교가 없으면 왕도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종교적 예민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그녀는 앙굴렘의 마르그리뜨가 쓴 『악한 영혼의 거울』(Mirror of a Sinful Soul)을 번역했으며, 예전 의식을 감상했다. 백성들이 국가의 법을 외적으로 준수하는 한 그들의 양심은 조사되어서는 안 된다고 엘리자베스는 주장했다.[Carter Lindberg, The European Reformations, 조영천 역, 『유럽의 종교개혁』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2), 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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