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사도행전 4:29)
앉은뱅이 사건으로 구금되었던 사도들이 풀려났습니다. 관리들은 사도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위협할 뿐이었습니다. 풀려난 사도들은 성도들과 연합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는 내가 기대하는 것과 다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초대교회 신자들은 악한 정치인들을 심판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처 회복과 안위를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악한 이들의 위협함을 굽어 살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그들은 원수 갚는 것을 주의 손에 맡기고 자신들의 사명에 집중합니다. 그들의 기도 제목은 이것이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하소서!” 우리는 기도에 대해 더 배워야 합니다. 아직 많이 멀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를 원합니다. 본문의 그리스도인들처럼 그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직 성령님께 사로잡히게 하소서. 복음 되신 예수님만 전파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이름만 높임 받으소서. 이것으로 족한 인생이기 싶습니다.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사도행전 5:2-3)
바나바라 불리는 요셉이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자신의 재산으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귀한 마음입니다. 바나바는 자원하여 이 일을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자극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나바의 헌신으로 그의 이름이 회자되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따라합니다. 땅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둡니다. 외견상 바나바와 같은 헌신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결말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일부를 바치고 전부라고 속였습니다. 부부는 바나바처럼 칭찬을 듣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잘못된 동기로 인한 그들의 위선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땅을 안 팔고, 믿음의 분수대로 주님을 섬겼으면 하나님께 합당한 칭찬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래도 안 바치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라는 항변은 소용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차라리 안 바치는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말라기 1:3)
모든 것에 부요하신 하나님은 구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위선을 버리고 진실하십시오. 마귀는 초대교회를 외적으로는 핍박으로, 내적으로는 위선으로 공격합니다. 성도여, 마음을 감찰하시는 성령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시편 기자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라고 고백한 것을 잊지 마십시오(시139:7). 회개하는 다윗이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것을 마음에 새기십시오(시51:10).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끝까지 진실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뒤를 따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