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사도행전 22:4-6)
우리는 바울의 회심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회심은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회심이 다양한 유형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회심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각 사람의 얼굴이 다르듯, 주님은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회심을 일으키십니다. 어떤 사람은 극적으로 회심하고, 다른 사람은 특별한 이야깃거리 없이 자연스럽게 회심합니다. 어떤 이는 이른 나이에 회심하고, 또 다른 이들은 나이 들어 회심합니다. 어떤 회심만을 진짜라고 치켜세우지 마십시오. 모두가 바울처럼 회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이기에, 예수께서 그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주셨습니다. 그는 삼층천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은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었느냐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사역은 회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가 체포당할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하며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말을 들어 봅시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사도행전 20:21)
그러므로 바울의 회심만을 전형적인 것으로 여기지 맙시다. 내가 주님을 만난 방식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지 맙시다. 성경적인 회개와 믿음을 앞세우면 체험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소나기를 맞든, 이슬비 속을 걷든 몸이 젖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최선의 방식으로 만나주실 것을 믿읍시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한복음 1:9-10)
바울은 설득으로 회심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심리적 압박 속에서 환각에 빠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세상을 지으실 때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새 사람으로 만드실 때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정오의 해보다 강한 햇살이 그를 비추자 어두움은 물러갔고, 새 생명이 바울에게 심겨졌습니다. 이 빛은 예수님이심을 요한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모두 길을 가다가 이런 빛을 보고 회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만났을 때, 이 빛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이 빛 까닭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빛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지난 죄악을 회개하였습니다. 친구여,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바울도 주님이 만나주셨는데, 당신이 간절한 마음으로 찾으면 만나주시지 않겠습니까?(잠 8:17)형제자매여, 주님을 매일 만나고 계십니까? 매일 아침 빛되신 예수님께 마음을 여십시오. 그분께서 그 얼굴빛을 당신에게 비춰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자에게는 신령한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이 가득할 것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린도후서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