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존 윌리엄 플레처(John William Fletcher, 1729-1785)가 출생한 날입니다. 1729년 9월 12일, 플레처는 스위스의 니옹(Nyon)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목회자 대신 군인이 될 것을 선택한 플레처를 막으셨습니다. 플레처는 승선하는 날 아침에 화상을 입어 군함에 타지 못했고, 평화협정으로 인한 군 병력 축소로 인해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메소디스트를 알게 되었고, 감리교 설교자를 통해 회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공회 목사로 임직을 받은 후, 플레처는 25년간 매들리(Madeley)의 교구 목사로 섬겼습니다. 탄광과 철공소의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던 매들리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역지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동역자였던 플레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행동하고 말하며 생각했다. 따라서 언제나, 모든 경우에 내면적인 명상을 하면서 하나님을 늘 그보다 우선시했으며, 모든 일에 흔들리지 않았다. 또한 그가 나가거나 들어올 때든 우리끼리 있거나 손님이 있을 때에도 이런 것으로부터 관심을 돌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때때로 혼자서 여행을 떠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와 수천 킬로미터를 함께 여행했는데 동행하는 사람, 장소 또는 여행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의 변화도 그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확고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했다……그는 자신과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즉각적인 교제로 끌어올리려고 항상 노력했다. 그리고 진실로 말하건대, 그와 내가 나누었던 모든 교제는 항상 기도와 찬양으로 뒤섞여서 모든 일과 식사에도 이런 향기가 배어 나왔다.[Peter Toon, Spiritual Companions, 정지훈 역, 『기독교 100대 고전』 (이천: 씨뿌리는사람, 2007), 228-29.]
플레처는 외국인으로 살면서 영어로 설교하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옹호하다가 트레베카(Trevecca)의 대학 학장직을 3년 만에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플레처는 존 길과 조나단 에드워즈, 윌리엄 거널과 벤자민 키치의 책을 가까이 하며 은혜의 교리를 전했던 사람이었음을 잊지 맙시다. 우리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결점에 빠질 수 있음을 인정합시다. 구령의 열정 없이, 차가운 가슴을 합리화하며 함부로 판단하는 오만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저는 플레처를 설교자로서 대단히 높이 평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그는 타고난 달변가였습니다……잘 훈련받은 지성과 성경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것을 제시하는 방법에 있어서 직설적이고 담대하며 가슴 깊은 곳을 흔드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상당히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전달 방식과 태도에 있어서도 남다른 열정과 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국인들이 그가 불어로 설교하는 것을 들으려고 런던에 있는 프랑스인 회중들이 모이는 교회로 찾아가곤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그를 보기 위해서 갑니다. 천국의 빛이 그의 얼굴에서 발하고 있기 때문이지요.”라고 그들은 말하곤 했습니다.[J. C. Ryle, Christian Leaders of the Eighteenth Century, 송용자 역, 『18세기 영국의 영적 거성들』 (서울: 지평서원, 2005), 6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