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4:1-5
[새번역]
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약속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여러분 가운데서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십시오.
2. 그들이나 우리나 기쁜 소식을 들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들은 그 말씀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도, 그것을 믿음과 결합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그 말씀을 믿은 우리는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진노하여 맹세한 것과 같이,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일을 끝마치셨으므로, 그때부터 안식이 있어온 것입니다.
4. 일곱째 날에 관해서는 어딘가에서 "하나님께서 일곱째 되는 날에는 그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다" 하였고,
5. 또 이 곳에서는 다시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NIV]
1. Therefore, since the promise of entering his rest still stands, let us be careful that none of you be found to have fallen short of it.
2. For we also have had the gospel preached to us, just as they did; but the message they heard was of no value to them, because those who heard did not combine it with faith.
3. Now we who have believed enter that rest, just as God has said, "So I declared on oath in my anger, 'They shall never enter my rest.' " And yet his work has been finished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4. For somewhere he has spoken about the seventh day in these words: "And on the seventh day God rested from all his work."
5. And again in the passage above he says, "They shall never enter my rest."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 '두려워할지니'의 헬라어 '포베도멘'(* )은 헬라어 본문에서 첫머리에 위치하여 그 의미가 강조되었다. 이것은 본 서의 수신자인 유대인 공동체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 에 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함을 시사한다(Lane). 모든 사람들이 방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보다 민감한 태도를 지닐 것을 요구하는 저자의 목회자적 관심을 나타낸다(11 절;3:12).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 '안식'의 헬라어 '카타파우신'(* )은 출애굽 세대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스라 엘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다(신 12:9-10).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대인 사이에서 이 안식의 개념은 주로 회당 에서의 가르침과 토론을 통해 형성된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Lane). 그래 서 시95:11의 '내 안식'은 본절에서 종말론적인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택 한 백성들을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의 안식을 의미한다(요14:1-4). 한편 '약속'(* , 에팡겔리아스)이라 함은 '안식'에 대한 약속을 말한다. 출애 굽한 제1세대는 죽었으나 제2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측면에서 안식에 대한 약속 이 성취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저자는 지역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약속 의 성취로 보지 않았다(Morris). 하나님께서 1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 셨던 안식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이행되지 않았으나 그 약속은 변치 않고 그리스도 안 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계속되어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이어받을 상속자 가 되었다(1:14;6:12,17;9:15).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 본절은 '있을까 함이라'로 번역된 헬라어 '도케'(* , '판단하다', '가정하다')를 해석하는 차이에 따라 달리 해석 된다. (1)혹자는 수신자들 중에 실제로 하나님께서 약속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 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로 해석한다(Moffatt, Stuart). (2)혹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 신 안식에 자신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Dods).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저자는 비록 안 식이 약속되었을지라도 그 약속을 상실한 사람들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Morris). =====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 '복음 전함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엥겔리스메노이'(* )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조'(* )의 완료 수동형이다. 하나님의 좋은 소식은 가데스 광야 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졌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그 언약을 잘 지키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복된 소식을 전해들었다(출19:3-6;23:20-33). 이와 동일하게 당시 수신자들도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하 나님께서 주신 복음, 즉 안식에 대한 약속은 동일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화합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전혀 유익하지 못했다. '화합지'에 해당하 는 헬라어에 대한 독법은 두가지이다. (1)'말씀'(* , 로고스)과 연결되어서 단수 인 '슁케케라스메노스'(* )로 읽는다. 이 경우 본문은 '말씀과 이를 들은 자들의 믿음과 화합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2)'저희'(* , 에케이누 스)와 연결되어서 복수인 '슁케케라스메누스'(* )로 읽는다. 이 경우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자 즉 여호수아와 갈렙과 믿음 으로 화합되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다. 두 가지 경우 중 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 하면 문맥상 여호수아와 갈렙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Morris, Moffatt, Hewitt). 한편 '믿음'의 헬라어 '피스테이'(* )는 본서에서 '순종'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3:18,19). 따라서 '믿음'은 정적인 신앙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을 향한 동적이며 실천적인 신앙임을 시사한다(Morris). =====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저자는 현 재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고 밝히고 있다. '들어가는도다'의 헬 라어 '에이세르코메다'(* )는 '에이세르코마이'(* ) 의 현재 중간태이다. 이 단어를 근거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시 기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에이세르코메다'가 현재형으로 이미 믿 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미래에 보장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Kistemaker, Lane, Montefiore). (2)혹자는 그리스도 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현재이나 그 완성은 미래에 있다고 주장한다 (Bruce).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의 완성이 미래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에 누리 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안식'(* , 카타파우신)은 시95:11의 '내 안식' (* , 카타파우시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안식' 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즐기시는 안식'을 의미한다(Morris, Bruce). 그 러므로 본절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즐기시는 안식에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동참하게 됨을 시사한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 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 이 구절 은 시95:11의 인용이다(3:11).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받은 하나님의 안식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하나님의 길을 의도적으로 거역한 결과이다. 그들이 안식을 누리지 못한 것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 노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안식이 폐지되었거나 혹은 안식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완성되어 있었다(H- ewitt, Morris). 세상 창조 때 완성된 하나님의 안식은 창2:2을 암시하는 것으로 하 나님의 안식이 창세 이후로 지속되고 있으며,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든 이가 참여해서 즐길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Bruce). =====4:4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 저자는 본절에서 창2:2을 인용하면서 (출20:11;31:17) '어디 이렇게'(* , 푸 후토스)라는 막연한 표현을 사용한 다. 이는 당시 성경에 장,절의 구별이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인 출처를 밝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 어느곳에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 저자는 창2:1-3에서 나타 나듯이 하나님이 하신 일과 그의 안식을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 자 신이 행하신 일의 완성과 만족을 시사한다. '하나님이 쉬셨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상태에 들어가셨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섭 리 가운데 인간을 구속하시고 유지하시며 통치하시는 일을 행하신다(요5:17, Hewitt). 본절에서 저자가 인용문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이 미래에 인간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창조 이래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4:5 또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 '또다시'에 해당하는 '팔린'(* )은 앞에서 인용한 문구에 다른 인용구를 첨가시킬 때 저자가 사용하 는 독특한 표현방법이다(1:5;2:13;10:30). 본절은 3절에서 인용한 시95:11의 반복으 로서 저자는 이 반복된 인용을 통해서 창조 이후에 취하신 '하나님의 안식'과 '구원받 은 인간에게 약속된 안식'을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안식에 대한 약속의 특성을 설명하 여 수신자들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한다(Lane, Schroger). 그래서 본절에서는 시 95:11a에 언급된 하나님의 진노가 생략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