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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9일 요한복음 18:11 / L.B.카우만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하나님께 더 가까이)』 L.B.COWMAN, STREAMS IN THE DES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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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9일 요한복음 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잔을 마심"은 바다를 꾸짖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보다 큰일이었습니다. 예언자와 사도들도 기적을 행할 수 있었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에 따른 고난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고난을 겪음은 여전히 가장 높은 형태의 믿음이요 가장 영광스러운 신앙적 성취입니다.

 

빛나던 젊은 꿈이 모두 스러졌습니다. 도움의 손길 한 번 없이 언제나 힘겨운 일상의 짐을 지고 갑니다. 다른 이들을 돕고자, 사랑하는 이들을 조금 더 풍족하게 하고자 자신은 가난에 허덕입니다. 치유할 수 없는 육신의 장애에 속박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떨어져 혼자서만 외로이 삶의 상처를 붙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에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의 훈련소를 다니며 능히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습니까?"

 

이것이 가장 높은 믿음이며 영적인 성공입니다. 위대한 믿음은 행함보다는 고난에서 드러납니다. 고난 받는 구주를 먼저 모셔야 연민하시는 하나님이 오십니다. 진정한 연민은 같은 고난을 겪어 남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값을 치르지 않고서는 고난 받는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없는데, 고난이라는 비용을 치러야 남들을 연민하는 능력을 살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남들을 돕고자 하는 사람은 고난부터 겪어야 합니다. 남들을 구해 내려 한다면 기꺼이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섬기며 삶의 크나큰 행복을 경험한다는 것은, 예수의 잔을 마심과 예수의 세례를 따름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다윗의 시편 가운데 가장 위로가 되는 작품들은 그의 눈물겨운 고난의 인생에서 나왔습니다. 바울이 “육체에 가시” (고후 12:7)를 받지 아니하였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 많은 서신들에 향기처럼 밴 부드러움과 친절을 지금처럼 많이 읽어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렸다면, 현재 여러분을 심하게 압박하는 환경은 아버지의 손에 들린 완벽한 도구입니다. 그분께서는 이 연장을 들고 여러분을 영원에 맞는 모습으로 다듬어 내십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사용하시는 연장을 밀쳐 내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삶에서 행하시는 그분 작업의 결과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 이상하고 어렵다고

우리 생각하겠으나,

우리에게 필요한 축복

그 뒤에 있습니다.

 

고난의 학교는 비범한 학자들을 배출합니다.

 

July 19

School of Suffering

The cup which my Father hath given me, shall I not drink it? — John 18:11

 

This was a greater thing to say and do than to calm the seas or raise the dead. Prophets and apostles could work wondrous miracles, but they could not always do and suffer the will of God. To do and suffer God’s will is still the highest form of faith, the most sublime Christian achievement. To have the bright aspirations of a young life forever blasted; to bear a daily burden never congenial and to see no relief; to be pinched by poverty when you only desire a competency for the good and comfort of loved ones; to be fettered by some incurable physical disability; to be stripped bare of loved ones until you stand alone to meet the shocks of life — to be able to say in such a school of discipline, “The cup which my Father has given me, shall I not drink it?”— this is faith at its highest and spiritual success at the crowning point. Great faith is exhibited not so much in ability to do as to suffer. — Dr. Charles Parkhurst

 

To have a sympathizing God we must have a suffering Saviour, and there is no true fellow-feeling with another save in the heart of him who has been afflicted like him.

 

We cannot do good to others save at a cost to ourselves, and our afflictions are the price we pay for our ability to sympathize. He who would be a helper, must first be a sufferer. He who would be a saviour must somewhere and somehow have been upon a cross; and we cannot have the highest happiness of life in succoring others without tasting the cup which Jesus drank, and submitting to the baptism wherewith He was baptized.

 

The most comforting of David’s psalms were pressed out by suffering; and if Paul had not had his thorn in the flesh we had missed much of that tenderness which quivers in so many of his letters.

 

The present circumstance, which presses so hard against you (if surrendered to Christ), is the best shaped tool in the Father’s hand to chisel you for eternity. Trust Him, then. Do not push away the instrument lest you lose its work.

 

“Strange and difficult indeed

We may find it,

But the blessing that we need

Is behind it.”

 

The school of suffering graduates rare schol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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