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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3:13-17 설교/2023년 11월 1일 수요/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This is my Son, whom I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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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3:13-17

[새번역]
13. 그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
15.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그제서야 요한이 허락하였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17.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였다.

[NIV]
13. Then Jesus came from Galilee to the Jordan to be baptized by John.
14. But John tried to deter him, saying, "I need to be baptized by you, and do you come to me?"
15. Jesus replied, "Let it be so now; it is proper for us to do thi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Then John consented.
16. As soon as Jesus was baptized, he went up out of the water. At that moment heaven was opened,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lighting on him.
17. And a voice from heaven said, "This is my Son, whom I love; with him I am well pleased."

예수께서 세례 받으심 (마태복음 3:13-17)

우리 주 예수님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거의 삼십세가 된 지금까지 갈릴리에 은거하셨다.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지리하고 어두운 밤이 지난 후, 보라! "의의 태양"은 저렇게 영광 중에 떠오르고 있지 않는가! 바야흐로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의 예언적인 직무를 수행하실 "적절한 때가 이르렀다." 그는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택하지 않고(그는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세 번에 걸쳐 이곳에 왔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세례 요한의 "세례를 주었던" 곳을 택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자들"이 그에게 호소하였기 때문이며, 그들만이 그를 환영하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우리 주님보다 6개월 먼저 출생하였고, 그가 전파하고 세례를 베풀었던 것도 그리스도가 출현하시기 약 6개월 전이었다고 추측된다. 그는 "요단강 인근 지방"에서 그의 길을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이를 위해 최근 6개월 동안 행한 일을 이전 몇 해 동안 행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리리로부터 "요단강"으로 오신 것은 우리가 의식에서 하나님께 접근할 기회를 얻기 위하여 어떠한 수고나 고통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보다 밀접하게 갖기 위하여 기꺼이 그에게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발견하려는 자는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신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1.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권유를 받고 가까스로 이를 허락하였다(14, 15절).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신 것은 그의 위대하신 겸손의 한 실례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찍이 복음 전파를 시작하시자마자 겸손을 가르치셨으며, 또한 이를 그 자신이 모본을 보이심으로써 가르치셨고, 모든 사람들 특히 젊은 사역자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리스도는 최고의 영광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의 첫 단계는 이와 같이 그 자신을 낮추시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무릇 높이 오르려고 하는 자는 낮아지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영예의 이전은 겸손이다"(Before honour is humility).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에게 대한 무상의 존경이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는 것을 주목하여 보고 그에게 행했던 봉사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무릇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세례 베풀기를 말리며 거절한 사실(14절).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발을 씻으려 했을 때 한사코 이를 말렸던 베드로와 같이(요 13:6, 8) "이를 말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신 겸손은 믿음이 강한 신자라 할지라도 단번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놀라운 것이며, 또한 너무 깊고 신비스러우므로 그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즉시로 그것들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흑암의 이성"에 의해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려 반대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겸손하게 이 영예는 자신이 받기에 너무도 큰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의 어머니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에게 행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겸손을 나타내고 있다. "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눅 1:43). 요한은 이제 큰 명성을 얻었고 널리 존경을 받았지만 이 얼마나 겸손한가! 하나님께서 더욱 존귀히 여기는 자는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영혼이 계속적으로 낮은 데 처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유의하라.

(1) 요한은 그가 마땅히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내가 당신에게 불과 같은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과 같은 성령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세례였기 때문이다(11절).

[1]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지만"(눅 10:15),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많이 소유한 자라고 할지라도 여기에서와 같이 불완전한 상태라면 더욱 더 가져야 하며 또한 더욱 많은 것을 그리스도에게 요구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2] 요한은 그가 "여자에게서 난 자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세례를 받아야할 필요가 있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으므로 그는 다른 아담의 후손들과 같이 부패하였으며 또한 그 자신도 깨끗케 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청결한 영혼은 그들 자신에게 잔존하는 불결한 죄의 더러움을 가장 민감하게 깨닫고 있으며, 또한 매우 진지하게 영적인 씻음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3]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었으니, 그리스도는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을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하지 못한 것이나 우리를 위해 하셔야만 하는 분이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의 지고성과 거룩성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며, 또한 그들이 더욱 그러한 사람일수록 더욱 구분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4]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이 대화는 요한을 매우 존경하고 그를 메시야로 추대하려는 많은 무리들 앞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요한은 아무 스스럼없이 공개적으로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로부터 버림을 받아 파멸 상태에 놓여 있다고 고백한다고 해서 그들의 위대성에 금이 가거나 경시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5]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지만,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받아야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시간적으로 그리스도보다 앞선 자라고 할지라도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서 받아야 하며, 그를 주시하고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6]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베푸는 교역자들은 그들이 자신들에 대해 전파하고 있는지를 특별히 유의해야 하며,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네 자신을 조심하라." "네 자신을 구원하라"(딤전 4:16).

(2)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가 그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죄인들로부터 구별된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죄인에게(by), 죄인으로(as), 죄인들 가운데서 (among) 세례를 받으려고 오실 수 있는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이 구절에 대한 예수님의 취소(1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그리스도는 요한의 겸손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지만, 그의 사양을 그대로 수락하신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일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것의 이유를 제시하지 못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방법을 취할 것임은 온당한 사실이다.

(1) 그리스도는 어떻게 그것을 끝까지 주장하셨는가? 그것은 "이제" 행해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요한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오히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려고" 하였다. Afejarti - "이제 허락하라." 즉 "이제 그것을 받도록 하라."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매사는 알맞은 때에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지금"인가?

[1] 그리스도는 "이제"겸손의 상태에 있다. 그는 자신을 비웠으며, 아무런 명성을 취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따라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셨다. 그는 완전히 순수하였지만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세례를 받으려 하셨으며, 따라서 "죄를 알지도 못하셨지만"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신"것이다.

[2] 요한의 세례는 지금 명성을 얻고 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그의 역사를 행하고 계시다. 그것이 현재 하늘의 섭리이며, 따라서 예수님은 이제 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그의 성령 세례는 오랜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행 1:5) 베풀어질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이제" 그 절정에 이르렀다.

[3] 그것은 "지금 행해져야만"한다.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이며, 그 일을 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요 1:31-34).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에 현현되어야 하며, 가장 겸손하고 겸비했던 그 자신의 행동에서 하늘로부터 기사에 의해 두드러지게 되셔야만 한다.

(2) 이에 대해 그가 제시한 이유는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이다.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에는 타당성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은혜스러운 것이었다(히 2:10; 7:26). 우리는 해야 할 것만 아니라 합당한 것을 행해야 하며, 또한 반드시 해야 할 것만이 아니라 "사랑스럽고 좋은 평판이 있는" 것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2] 우리 주님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자신에게 매우 합당한 것으로 여기셨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휘트비 박사가 설명한 것과 같이) 모든 신적 제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모든 법칙을 준행하려는 마음의 준비를 나타낸다. "그가 이와 같이 하여" 회개의 세례에 의해 그의 길을 준비시키려고 요한을 보내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롭다 하고 그의 지식을 인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법칙과 마찬가지로 모범에 의해 선한 모든 것을 후원하고 격려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스도는 종종 요한과 그의 세례를 훌륭하게 언급하였으며, 그는 더 나은 일을 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맨 처음 행하시고," "그 다음 가르치시기" 시작하셨다. 그의 사역자들도 똑같은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하여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씻음에 대한 "의식적인 율법의 의를 성취하셨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세례에 대한 복음적 의식을 그의 교회에 천거하셨으며, 그것을 존귀케 하셨고, 그것에 어떤 효능을 두시려했는가를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물 씻음에 복종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물 씻음을 반대하신 것은 그것이 인간이 발명하고 고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것을 쫓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뜻과 이러한 이유로 요한은 아주 만족하였으며, "이에 그는 허락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맨 처음 그에게 베푸신 영예를 극구 사양했던 겸손은 이제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봉사를 수행하도록 만들었다. 겸손을 구실로 우리의 의무를 사양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Ⅱ. 하늘은 엄숙하게 특별한 영광을 나타냄으로써 그리스도의 세례를 기꺼이 빛내어 주었다(16, 17절).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셨다" 세례를 받았던 그 밖의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고백하기 위해 머물러 있었지만"(6절), 그리스도는 고백할 죄가 없으므로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물에서"(aps ton ndatoj)란 말은 그가 물로 씻음 받기 위하여, 즉 그의 머리와 얼굴을 씻기우려고(요 13:9) 내려갔던 "강가에서"란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그가 옷을 벗고 세례를 받았다면 그 옷을 입었다든지, 벗었다든지의 설명이 반드시 있어야 할텐데 여기에는 그런 부대 설명이 없다. 그는 최고의 상쾌함과 확고한 결심으로 일을 착수했던 사람처럼"곧 물에서 올라 오셨다." 그는 시간을 낭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까지 얼마나 곧장 걸어가셨던가!"

이제 그는 "물에서 올라 오셨으며," 모든 사람들은 이목을 집중하였다.

1. "보라, 하늘이 그에게 열리지 않았던가!" 적어도 별이 총총한 창공 저편에 있는 어떤 것을 그에게 나타내기라도 하는 듯이.

(1) 이것은 그로 하여금 "그의 앞에 놓여진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떠맡은 임무를 계속 수행해 나가도록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하늘은 지금 그가 착수하고 있는 일을 다 마쳤을 때 그를 영접하기 위하여 열려 있다.

(2)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복종하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를 통하여 하늘은 사람의 자녀들에게 열려져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죄는 하늘을 닫았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중지시켰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하늘 나라를 모든 믿는 자들에게 개방하셨다." 신적인 빛과 사랑은 사람의 자녀들에게 두루 임하였으며, "우리는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담대함을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받았으며, 하나님께 의무로 보답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중개되는데, 그는 밑 부분을 땅에 두고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 사닥다리이며,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안락한 교제를 갖거나 마침내 하늘나라를 얻게 될 소망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이 열린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충실히 이행할 때에만 그와 더불어 교제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2.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또는 비둘기처럼)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시는(또는 비추시는)것을 보았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보았고(막 1:10), 요한도 그것을 보았으며(요 1:33, 34), 또한 아마도 곁에 있던 사람들도 이것을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공적인 취임임을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성령이 내려 그를 비추었다." 옛 세례의 맨 처음에 "하나님의 영"은 마치 새가 둥우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처럼 "수면에 운행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는 새 세계의 맨 처음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시지만 성령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것이 아니라, " 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실 것이라"(사 11:2; 61:1)고 예언되었으며, 이곳에서도 그렇게 하셨다. 왜냐하면,

[1] 그는 예언자이시기 때문이었다. 예언자도 언제나 그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그의 예언적인 임무를 신적 본성(휘트비 박사의 말)에 의하지 않고 성령의 영감에 의해 수행하셨다.

[2]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이었다. "성령은 그에게 내렸으며," 그로 말미암아 은혜와 은사와 위로에 있어서 모든 신자들에게 파급되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하여 "사람을 위해 선물을 받으셨다."

(2) "성령은 비둘기같이 그 위에 임하셨다." 이 비둘기가 살아있는 실제의 비둘기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환상에서와 같이 비둘기와 유사한 형상인지는 확실치 않다. 만일 형체나 형상(눅 3:22)이 있었다면 그것은 사람의 형체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양으로" 보여지는 존재는 특별히 제 이위 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짐승 중 하나(하늘은 지금 열려져 있다)임에 틀림없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비둘기가 이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성령은 비둘기 같이 성령이다. 이 성령은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비둘기"같지 않으며, 불쾌감이 없는 결백한 비둘기 같다. "성령"은 공중의 왕이지만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잔인한 새인 독수리와 같은 형체로 내려오지 않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무해하고 악의가 없는 "비둘기의 형체로" 내려왔다. 그리스도의 성령도 이와 같았다. "그는 다투거나 들레지 않을 것이다." 기독자들은 "비둘기와 같이 남을 해하지"말아야 한다. 비둘기는 특히 눈이 두드러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눈(아 5:12)과 교회의 눈(아 1:15; 4:1)이 비둘기의 눈과 비교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동일한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둘기는 많이 운다(사 38:14). 그리스도는 종종 우셨다. 참회하는 영혼은 "골짜기의 비둘기"에 비유된다.

[2] 비둘기는 희생 제물로 드려졌던 유일한 날짐승이었으며(레 1:14),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성령"에 의해 "하나님께 자신을 흠 없이 바쳤다."

[3] 노아 홍수 때에 물이 감소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준 것은 입에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온 비둘기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화평에 관한 기쁜 소식은 "비둘기 같은" 성령에 의해 전달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사람에게 전하며, 또한 우리를 향하신 그의 뜻은 "선하시며 악이 없으시다." "반구(비둘기)의 소리가 우리의 땅에 들림"(아 2:12)으로써 갈대아의 석의(釋義)는 "성령의 소리"를 이해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화해하신다는 것은 "비둘기의 날개"를 타고 우리에게 전해진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3. 이 엄숙함을 설명하고 완성하기 위하여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던 "하늘로부터의 소리가 있었다." 성령은 그 자신을 "비둘기"의 형체로 나타내셨으나 하나님 아버지는 "소리"로 나타내셨다. 왜냐하면 율법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신 4:12). 일찍이 하늘로부터 땅에 왔던 최고의 소식인 복음은 그렇게 왔고 또한 그러하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하고 명백하게 그리스도에게와 또한 그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여기에서 어떻게 우리 주님을 인정하고 계신가를 살펴보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로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1] 하나님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이는 내 아들이다"로 나타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하나님께로 난" 그의 아들이시다(골 1:15; 히 1:3). 또한 이것은 초자연적인 임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임신"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졌다(눅 1:35).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세상의 구속자라는 특별한 임무와 사명을 맡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이를 위해 성별 되었고, 파송되었으며, "아버지의 양육을 받았으며"(잠 8:30), 임명되었다. "내가 그를 내 장자로 삼을 것이다"(시 89:27).

[2] 아버지 하나님이 그에게 지닌 애정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즉 그가 아끼는 아들, 그의 "사랑의 아들"(골 1:13)이다. 하나님은 그를 영원 전부터 자기의 가슴속에 품고 계셨으며(요 1:18), "언제나 그의 즐거움"이었다(잠 8:30). 그러나 특별히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또한 사람의 구원 역사를 떠맡은 일에 있어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는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자"(사 42:1)이다. 그는 구속의 언약에 동의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였다"(요 10:17; 3:35). "보라," 그리고 경탄하라.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가를!" 그는 실로 그의 사랑하는 자를 내어 버렸고 그의 진노의 자식이었던 자들을 위해 고난을 받고 죽게 하셨다. 아니,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유일하신 아들, 그가 사랑하신 이삭을 우리의 죄를 위해 서슴없이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신 것"은 그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증거가 아니고 또 무엇인가!

(2)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인정하시려는가를 알 수 있다. 즉 그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와 "더불어"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자와 신앙으로 그와 연합된 자를 기뻐하신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사람의 자녀들을 싫어하셨으나 지금은 그의 분노가 사라졌으며, 또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영접"하셨다(엡 1:6). 모든 세계여, 주목하라. 이 분이야말로 우리에게 양손을 얹으신 평화의 조성자, 중개자이시며,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요 14:6) "그 안에서 우리의 영적 제사는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선물을 거룩케 하시는" 제단이기 때문이다(엡 2:5). 그리스도에게서(out of)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in) 하나님은 화목케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이것이 모든 복음의 총합(sm)이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의 소리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며, "그가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진실한 말씀"이다. 우리는 기꺼이 이 말씀에 의견을 함께 해야 하며, 그는 우리의 사랑하시는 구세주이며 "우리는 그를 기뻐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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