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3:7-12
[새번역]
7.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8.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10.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 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2.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NIV]
7. But when he saw many of the Pharisees and Sadducees coming to where he was baptizing, he said to them: "You brood of vipers! Who warned you to flee from the coming wrath?
8. Produce fruit in keeping with repentance.
9. And do not think you can say to yourselves, 'We have Abraham as our father.' I tell you that out of these stones God can raise up children for Abraham.
10. The ax is already at the root of the trees, and every tree that does not produce good fruit will be cut down and thrown into the fire.
11.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2.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세례요한의 설교 (마태복음 3:7-12)
세례 요한이 전파한 가르침은 "임박한 천국"을 생각하고 외쳤던 회개의 가르침이었다. 이제 여기에는 그 가르침의 적용이 나타나 있다. 설교의 생명이 실제 생활의 적용에 있듯이, 세례 요한의 설교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이 설교를 적용한 대상. 적용한 대상은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7절).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생각과 입장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들은 그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있었던 세 종파(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중에서 두 종파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 중 에센파에 대해서는 복음서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이 은둔 생활을 하였고 공적인 일에 전혀 종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의식과 교회의 세력, 장로들의 유전 등에 열심있던 자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이들과는 정반대의 극단으로 흘러서 영들이나 내새의 존재를 부인했던 자연신론자들과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이 세례 베푸는데 온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실상은 호기심으로 들어보려고 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그들 중 몇 사람은 복종하여 세례를 받았을 것이나, 그들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눅 7:29, 30)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의식(儀式)에 나아오지만 그 의식의 참된 힘을 맛보지 못한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이들에게 모든 진실 됨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그가 말했던 것을 그는 또한 모든 무리에게 말하였다(눅 3:7).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세례 요한이 말한 것과 관계되었기 때문이다.
2. 그 적용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평범하면서도 급소를 찌르는 것이며,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는 단지 "그들 앞에서"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부딛치는 설교였다. 비록 그는 공식적인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사사로운 교육을 받았으나 대중 앞에 나타났을 때는 부끄러워하거나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Ⅰ. 여기에는 먼저 확신과 경각의 말씀이 있다. 그는 처음부터 거칠게 말을 했으며, 그들이 평소에 듣고 있었던 랍비라는 호칭도 쓰지 않았고 칭찬도 하지 않았다.
1. 그가 그들을 부르는 데 사용한 호칭은 "독사의 자식들아!"였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을 같은 칭호로 불렀다(마 12:34; 23:33). 그들은 "독사"와 같은 자들이었다. 겉모양은 그럴 듯하나 독을 품었으며, 모든 선한 것들에 대해 악의와 적의가 가득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 즉 그들과 똑같은 마음씨를 가졌던 자들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들이 그 뱀의 후손(창 3:15), 즉 그들의 조상 마귀의 후손(요 8:44)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모두가 한 가지로 "독사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간에 원수지간이었으나 악한 일에는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악한 세대는 "독사의 세대"이며, 그들은 그렇게 불리워지는 것이 마땅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마땅히 죄인들에게 그들의 참된 본성을 담대하게 알려 주어야 한다.
2. 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준 "경고"는 "누가 너희를 일러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였다. 이것은 그들이 임박한 진노의 위험에 처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들의 처지는 거의 절망적이었고, 그들의 마음은 죄로 강퍅해졌기 때문에(즉 바리새인은 그들의 믿음을 자랑함으로, 또한 사두개인들은 믿음을 대적함으로) 그들 가운데서 희망적인 일이 생겨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것임을 의미한다. 즉 "무엇 때문에 또는 너희들이 무엇을 두려워하여 천국에 대해 물으려 하는가?" 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필 수 있다.
(1) "임박한 진노"가 있다. 즉 지금 현재 쏟아지는 진노 이외에 후일을 위해 쌓아둔 미래에 당할 진노가 있음을 말한다.
(2) 이 진노를 피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가장 큰 관심이다.
(3) 우리에게 이러한 진노를 피하도록 경고하신 것은 놀라운 자비이다. "누가 우리에게 경고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가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으로, 교역자들에 의해서, 또한 양심으로 경고하신다.
(4) 이러한 경고들은 때때로 안심하고 있는 자와 그들 자신에 대해 선하다고 생각하는 강팍한 자들에게는 큰 놀라움을 준다.
Ⅱ. 여기에는 "권고와 지시"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그러므로 너희는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는 경고를 받았으니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경건한 생활을 하기를 힘쓰라는 것," 또는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를 공언하고 회개의 세례와 가르침에 참예하였으니 너희가 진정으로 참회한 증거를 나타내 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는 마치 뿌리와 같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모든 죄를 버리고 선한 것을 붙잡으며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개혁함으로써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우리는 공연히 마음속에 회개했다고 꾸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axionj thj metanoiaj)들이다. 죄를 뉘우친다고 하면서도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는 회개한 자라는 명칭이나 회개한 자가 가지는 특권을 소유하기에 합당치 않은 자들이다. 세례 받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회개를 공언하는 자들은 모름지기 회개한 자로서의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하며, 회개한 죄인으로 합당치 못한 어떤 일도 행해서는 안 된다. 회개한 자로서 합당한 일이란 겸손하고 눈이 높지 않은 일이며, 가장 적은 자비에도 감사할 줄 알며, 극심한 고통도 참으며, 죄는 그 모양이라도 경계하며, 죄로 접근하는 것도 삼가며, 해야할 모든 의무에 있어서 넘치게 행하며, 남을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 자비로운 것 등이다.
Ⅲ. 여기에는 또한 그들의 외적인 특권을 믿고 회개에의 부르심을 저버리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9절).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 육적인 마음이 우리에게 속삭여 교역자들이 힘써 만나려 하고, 기대해야 할 하나님 말씀의 확실하고 힘있는 권능을 밀쳐놓게 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헛된 생각들이며 예레미야는 이럴 생각을 품고 있는 자들에 대해 "너희는 마음을 씻으라"고 명령하고 있다(렘 4:14).
Mh, doxhte-"하지 말라, ∼인체 하지 말라, 즉 속으로 ∼라 하지 말라, 이것이 너희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러한 교만을 품지 말라"는 뜻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여 스스로 기뻐하지 말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한 생각을 품고 편안히 졸거나 헛된 기대를 꿈꾸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히 입 밖으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하는 말을 주목해 보시며, 우리 영혼의 그릇된 안심과 기대, 그리고 우리 영혼이 스스로를 속이며 그 정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 거짓을 모두 잘 알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망하게 하는 거짓말을 "오른편 손 안에" 감추며 그것을 고백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여 "혀 아래로 굴러 버리고"만다. 그들은 마귀의 계획을 지킴으로써 마귀를 이롭게 한다. 이제 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려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자랑하는 구실은,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며,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죄인들이 아니다. 그들이 마땅히 회개해야 한다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개가 택한 백성이요. 거룩한 민족인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요, 우리에게 속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은,
(1)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도 없고, 회개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아브라함에 대한 관계와 그와 맺어진 계약에 관계된 것이 너를 거룩하다고 일컬어 너희 마음과 생활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2)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을지라도 무슨 큰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심판하는 일에서 제외되거나 임박한 진노를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또한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의 회개치 않음을 그대로 묵인할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비록 선하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지닌 선한 관계들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설령 경건한 조상들의 피를 이어 받고 종교적인 교육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잘 경외하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우리에게 충고해 주고 위해 기도해 주는 훌륭한 친구들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회개의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가?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와 더불어 맺은 언약의 특권에 참예할 자격이 있다. 즉 우리는 그의 자손이기 때문에 "교회의 아들들, 즉 여호와의 전"(렘 7:4)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대개의 많은 사람들이 현세적인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영광과 특권에 스스로 지나친 신뢰를 둠으로써 천국에는 못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이다.
2. 이러한 구실은 얼마나 어리석고 근거 없는 것이었는가!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자기들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소유한 백성이며, 따라서 그들이 만일 멸절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는 교회 때문에 곤란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이러한 자만심이 실로 어리석은 것임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즉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가 속으로 무엇이라고 말하든지간에)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9절)고 외쳤다. 그는 이제 "통과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다바라 근처의 요단강(요 1:28)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는데, 이곳은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통과한"일이 있으며 여호수아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각 지파에게서 돌 하나씩을 취하여 세운 열 두 돌이 있는 곳이었다(수 4:20). 그것은 하나님이 일으킬 수 있었던 그 돌들이 단지 묘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을 지칭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아마도 이사야 51장 1절에 있는 아브라함이 너희를 떠난 반석"이라는 구절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삭을 이와 같은 반석에서 떠내신 하나님은 만일 필요하다면 그 이상의 일도 다시 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불가능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당시 그곳에 있던 "이방인 군인들"을 가리키면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 자신을 위해 교회를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을 넘겨 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추측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첫 번째 부모가 범죄 했을 때 그들을 멸망시키고 돌로 또 다른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내실 수도 있으셨다. 또한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즉, "너희와 같이 강퍅하고 냉담하고 쓸모 없는 죄인들보다는 오히려 이 돌들이 더 훌륭하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현 세대가 어떻든 간에 하나님은 결코 세상 교회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시온에 있는 죄인들의 확신에는 낙심을 주지만 시온의 아들들의 소망에는 격려가 된다. 만일 유대인들이 꺾이어 넘어진다면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을 것이다(마 21:43; 롬 11:12).
Ⅳ. 여기에는 경솔하고 안일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또한 시대의 표적을 모르고 그들에게 닥칠 재난의 때에 무관심한 유대인들에게 두려움의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있다(10절). "너희들의 주위를 살펴 보라.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려라!"
1. "너희의 재난이 얼마나 엄격하고 급박한가? 도끼가 너희 앞에 옮겨져 이미 나무의 뿌리에 놓였으며, 또한 선한 행실을 지속해야할 때가 이르렀다. 지금이야말로 너희들이 멸망할 시기가 바야흐로 다가왔으며, 즉각적이고 진지한 회개 없이는 도저히 이를 피할 수 없다. 이제 하나님은 이전보다 더 빨리 너희에게 심판을 행하실 것이며 이 심판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방법을 많이 허용하신 곳에는 시간을 적게 허용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속히 오리라." 이제 그들은 마지막 시련을 당해야할 위기에 놓여 있다. 기회는 바로 지금이며 이후에는 결코 없다.
2. "만일 너희가 이것을 고치지 않는다면 너희의 운명은 얼마나 쓰라리고 비참할 것인가!" 이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져 있다고 선포된 것은 하나님은 그 선포에 있어서 진지하심을 보여 주며, 또한 "모든 나무마다" 그 타고 난 재능이나 영광에 있어서 아무리 "높다고"할지라도, 외적인 직업이나 행위가 아무리 "푸르다"고 할지라도 회개에 합당한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어버림"을 당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내어버림"을 당하며, 결국 쓸모 없는 나무들은 가장 적합한 장소인 하나님의 "진노의 불"속에 던지움을 받을 것이다. 이 밖에 그들이 소용될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들은 땔감으로 적합하다. 이것은 아마도 로마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대개의 심판이 그러했듯이 싹이 돋아날 뿌리는 남겨둔 채 가지를 자르든지 나무둥지를 베어내는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을 여지없이 멸망시키는 전체적이고 최후적이며 회복시킬 수 없는 완전 파멸의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끝장을 내실 것이므로 진노는 극도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Ⅴ. 요한의 모든 설교의 중심이 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전파해야만 한다.
1. 여기에는 세례 요한보다 더 높은 그리스도의 위엄과 탁월성이 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하여 어떻게 자신을 비천하게 말하였는가를 살펴보자(11절).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성례의 효력은 그것을 베푸는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들은 단지 표시로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권이다(고전 3:6; 왕하 4:31).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왔기 때문에 큰 권능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리스도는 더 큰 것을 가지셨다. 주님이 보실 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마 11:11) 요한은 실로 위대하였지만 그는 자신을 "그의 신들메를 들기도 감당치 못할" 무가치하고 비천한 자로 여기고 있다.
(1)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가 그에 비하면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 분인가를 잘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보다 능력이 더 많으시며,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을 "위해," 그들에 "의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실한 교역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그의 능력은 연약함 가운데서 그 효력을 발생한다.
(2) 세례 요한은 그가 그리스도에 비하면 그의 신들메를 들기도 감당치 못할 만큼 비천한 줄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영예를 주신 자는 매우 겸손하고 그 자신이 스스로를 볼 때에 비천하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높여지기 위하여 기꺼이 그 자신을 낮추며, 그리스도만이 전부가 되기 위하여 그 자신 아무 것도 아닌 자,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2. 여기에는 그들이 지금 급박하게 기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출현의 목적과 의도가 있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보냄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예언되었을 때(말 3:1, 2), 이에 곧 뒤따라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며,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을 것이라"(3절)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엘리야가 온 이후에는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올 것이며," 세례 요한은 여기에서 이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1)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그의 능력 있는 은혜의 사역에 의해" 구별을 짓기 위함이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즉 너희 중 어떤 사람에게)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1] "불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권이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베푸신 성령의 특별 은사에서 이 일을 행하셨으며, 그 자신이 요한의 이 말들을 이 일에 적용시키고 있다(행 1:5). 그는 요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을 은혜와 위로에서 이 일을 행하시고 있다(눅 11:13; 요 7:38, 39; 행 11:16 을 보라).
[2] 성령으로 세례 받는 자들은 "불로" 세례를 받는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일곱 등불"로 나타난다(계 4:5). 성령은 조명의 역할을 하며 모든 것을 밝게 하며 덥게 하며 태운다. 즉 성령은 "태우는 영"으로서 모든 부패와 그 불순물을 깨끗이 태워버리며,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을 그 자체와 같이 거룩하고 정결하게 만든다. 또한 불은 하늘을 향하여 탄다. 또한 성령의 불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삼커버린다. 그리스도는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씀하신다(눅 12:49).
(2)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그의 심판의 마지막 결정에 의해" 구별을 짓기 위함이다(12절). "그는 손에 키를 들고 계시다." 참 빛에 의해 모든 것을 통찰하시는 아버지의 영원한 지혜자로서의 그의 식별하는 능력과, 또한 모든 심판이 위탁된 인격자로서의 그의 식별하는 권리는 "그의 손 안에 있는 키"이다(렘 15:7). 이제 그는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 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 보이는 가시적(可視的) 교회는 그리스도의 마당이다.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사 21:10). 교회의 모형인 성전은 타작 마당 위에 세워졌다.
[2] 이 마당에는 밀과 겨가 섞여 있다. 참 신자는 실속 있고 유익하고 가치 있는 밀과 같으며, 위선자는 가볍고 속이 비고 쓸모 없고 무가치하고 바람에 날러가 버릴 겨와 같다. 밀고 겨는 현재 똑같은 외적 신앙 고백과 똑같은 가시적 집단 속에 함께 어울려 섞여 있다.
[3] 타작 마당이 정하게 되어 밀과 겨가 구별되는 날이 온다. 이러한 종류의 어떤 일이 종종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승들을 바벨론에서 부르시는 때이다(계 18:4). 그러나 대규모로 키질하고 구별하는 날, 즉 교훈과 공력(고전 3:13), 사람들(마 25:32, 33)에 대해 판결하는 때는 마지막 심판날이다. 그때에 성도와 죄인은 영원히 구분될 것이다.
[4] 하늘은 창고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곳으로 그의 모든 밀을 즉시 모아들일 것이며 그 중의 한 알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것들을 잘 익은 곡식들을 거둬들이는 것처럼 모을 것이다. 죽음의 낫은 그들을 자신의 백성에게로 모이게 하는 데 사용된다. 성도들은 천국에서 함께 소집되며, 결코 흩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안전하며 더 이상 노출되지 않는다. 외부적으로는 타락한 이웃들과 분리되며, 내부적으로는 타락한 감정들과 격리된다. 그들에게는 결코 겨가 없다. 그들은 "곳간"(마 13:30)과 "창고"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그들은 철저히 정결하게 된다.
[5]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로서, 겨를 태울 것이며, 정녕 위선자와 불신자의 운명(몫)과 형벌, 영원한 파멸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삶과 죽음, 선과 악이 주어져 있다. 우리는 지금 "밭"에 있지만 그때에는 "마당"에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