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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5 설교/2023년 11월 23일 목요/복되도다 온유한 사람들이여, 그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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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5:5

[새번역]
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NIV]
5.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을 받을 것임이요” 이 진술은 주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큰 쇼크로 임했을 것이 틀림없다. 유대인들은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에게 있어 메시야는 그들을 전쟁의 승리로 이끌어 줄 분을 의미했다. 주님은 즉각 그들의 이 같은 생각을 물리치셨다.

더 나아가 이 복은 비참하게도 오늘의 교회의 사고방식과 매우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교회가 분열되어 있으니 우리는 모두 연합해야 한다. 우리는 저 원수와 대결하기 위해 단 하나 거대한 조직(기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온유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이다. 자신의 조직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세력과 제도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수를 늘이시지 않고 계속 줄이셨다. 이것이 영적 방법이다.

- 팔복의 각 복은 다음의 복을 암시하며 다음의 복으로 연결된다. 먼저 ‘심령의 가난’에 대한 선결 조건이 나온다. 그 조건이란 우리가 죄를 알게 될 때 차례로 애통의 상태로 인도되는 근본적인 영을 말한다. 이 영은 차례로 온유한 영으로 인도한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각 복 사이에 이런 논리적인 관계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팔복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더 난해하고 우리로 하여금 더 겸손하게 하고 굴욕감을 느끼게 한다.

첫째 복은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 인식을 요구한다. 자기의 힘으로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 되기 시작도 못했다. 이 복은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고 느끼게 한다. 우리의 사람됨이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인식할 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복은 우리의 죄성과 우리의 성품을 알게 되고, 속에 거하는 죄 때문에 심한 무력함을 알게 된다. 최선의 행동과 생각과 의욕에도 죄가 있음을 보게 되며 우리도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는가? 라고 부르짖게 된다.

여기에 더 나아가 셋째,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자신의 철저한 하찮음과 무능, 내 속에서 나를 이끄는 죄악, 이 두 가지를 모두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같은 것들을 말하게 허용하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이겠는가? 나는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나 자신이 그것을 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서취라이트’를 비추게끔 허락하는 일이다.

-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아브라함은 한마디 불평도 불만도 없이 어린 롯으로 하여금 자기의 마음대로 먼저 선택하도록 한다. 놀라운 온유이다. 모세는 땅 위의 모든 사람보다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자기를 비천하게 생각하고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온유를 본다. 모세는 애굽 궁정과 바로의 딸의 아들로서의 모든 가능성을 참되게 평가했으며,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낮추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원하지 않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어떻게 계속 전했는가를 보라. 스데반과 바울의 온유를 보라.

놀라운 온유의 최고의 실례인 주를 바라보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셨다. 그의 전 생애에서 박해와 경멸과 야유와 조롱을 참으신 것을 보라. 그의 원수들에 대한 태도, 더욱이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복종은 그의 온유를 보여준다. 바울이 빌립보 2장에서 기록한 주의 모습을 보라. 그는 스스로 겸손하여 종과 같이 되셨고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이 온유이다. 이것이 참된 겸손이다. 이것이 주께서 여기서 가르치시는 자질이다.

- 온유란 무엇인가?

온유는 생래적 기질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기질과 심리야 어떻든 모두 누구나 이 같이 되도록 작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거의 끓는 가마솥과 같다고 했지만 온유했다. 막강한 지도자요, 비상한 인격자요, 강인한 인물인 사도 바울의 철저한 겸손과 온유를 생각해 보라. 온유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만드신 것이다.
 
온유는 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온유는 무기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안이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온유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온유가 아니고 무기력이다. 온유는 싹싹하다거나 사귀기 쉬운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온유는 연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구나 타협이나, ‘견해 차일랑은 덮어버리고 행복합시다’하는 평화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온유는 위대한 능력과 모순되지 않는다. 온유한 사람은 진리를 굳게 믿는 까닭에 필요하다면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사람들이다. 순교자들은 온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단코 약하지는 않았다. 이 고상한 자질을 동물적, 육체적, 생래적인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온유란 외적 태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내적 정신의 문제이다. 참 온유는 참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참는다거나 견딘다는 느낌도 갖지 않는 상태이다. 입을 통제해야 하며,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소명을 받았고, 이런 사람이 되기로 작정함을 받았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결국 온유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와 행동에서 표현되는 자기에 대한 올바른 견해이다. 그러므로 온유는 두 가지이다. 나 자신에 대한 자세인 동시에,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의 나의 태도의 표현이다. 사람의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고서는 결코 온유할 수 없다. 자기가 악한 죄인임을 보지 못하고서는 결코 온유할 수 없다. 나의 죄성 때문에 가난한 심령과 애통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게 될 때에만 교만은 없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에게는 자랑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다. 온유가 ‘자기를 표현하라’ ‘자기를 주장하라’라고 말하는 오늘의 인기 심리학을 부정하는 말이다. 온유한 사람은 또 자기를 위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의 지위나 특권이나 소유물이나 신분을 요구하지 않는다. ‘곧 예수의 마음이다’

더 나아가 온유한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피면서 삶을 거의 소비하고 있다. 자신을 더 이상 방어하지 않는 것은 방어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우리 속에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자기 연민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으로 얼마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온유한 사람은 이것을 모두 끝장낸 사람이다. 여러분은 그 아무도 우리를 해할 수 없음을 알게 됨을 의미한다.

“이미 넘어져 있는 사람은 넘어질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요한 번연)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그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온유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온유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서 나타나야 한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배후가 있고 그분이 그것을 갚아 줄 것을 알기 때문에 보복의 영을 완전히 버려야 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당한 취급을 받을 때 인내하고 오래 참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그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하므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16-21)

동시에 온유는 우리가 귀를 기울여 배울 자세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 온유는 항상 배우려는 영을 의미한다. 배우고 귀를 기우릴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끝으로 온유는 모든 것, 우리 자신, 권리, 대의, 우리 앞날, 모두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그리고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 특히 그래야 한다. 우리가 갚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기만 하면 된다. 주께서 원수를 갚으실 것이다.

- 온유한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게 되는가?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얻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이미 이생에서 땅을 얻는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항상 만족을 얻는 사람이다. 그는 이미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골드스미스-작가, 목사)

바울은 이것을 더 훌륭히 표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부요하게 살 줄도 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여러분이 온유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것은 여러분의 것이다. 여러분은 이미 땅을 얻은 것이다.

동시에 이 말씀은 미래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녀라면 또한 상속자 곧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7) 우리는 그와 함께 땅을 소유할 것이다. 그와 함께 왕노릇 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눅14:11) 이것이 온유이다. 성령이 아니시면 아무것도 우리를 겸손하게 할 수 없으며, 성령이 아니시면 아무 것도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우리의 죄성 때문에 우리를 애통하며..

matthew55preaching.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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