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5:8
[새번역]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KJV]
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여기서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성경의 어느 곳에서보다도 가장 위대한 말씀들의 한 대목에 이르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란 말씀의 뜻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경외감과 자기가 완전히 부적격하다는 감을 가져야만 이 말씀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 진술이 처음으로 발설된 이후 하나님의 백성들의 주목을 끌어온 것은 물론이며, 이 말씀을 풀이하기 위해 많은 책들이 쓰여졌습니다. 그러므로 한 장만으로 이 진술을 완전히 다룰 수 있기를 바랄 수는 분명코 없습니다. 참으로 본문을 완전히 풀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본문에 대한 그 많은 저작과 설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본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파악하는 최선책은 본문의 중심되는 의미와 강조된 것의 일부를 파악해 보려는 것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본문을 배경에 비추어 살펴보고 다른 팔복에 대한 관계에서 연구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살펴 본 바와같이 우리 주님은 이 진술들을 함부로 선택하시지 않았습니다. 분명코 팔복에는 일정한 사상의 연결이 있으므로, 이것을 발견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이렇게 할 때에는 항상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순서와 연결을 발견해 내는 일은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순서와 연결에 대하여 우리 나름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을 성경 본문에 적용하기 쉽습니다. 성경을 분석하는 일은 매우 유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름의 분석을 성경에 적용함으로 성경의 메시지를 왜곡시킬 위험이 항상 따릅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순서를 발견해 내려고 할 때 이것을 경고로 삼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 연결을 이해하는데 가능한 방법으로 다음의 방법을 제의하려고 합니다. 대답되어야 할 첫째 질문은 어째서 이 말씀(본문)이 여기에 오는가? 여러분은 본문이 마땅히 맨 처음에 와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까닭인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보는 일, 이것은 사람의 온갖 노력의 궁극적 목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모든 종교의 전 목적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것이 서두에도, 끝에도, 그리고 정확히 가운데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곧 다음의 질문들을 우리들 마음속에 일으켜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어째서 여기에 와야 하는가? 저의 마음을 끄는 이것에 대한 한 가지 가능한 분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6절이 설명을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세 복은 이곳에 인도되고 다른 복들은 6절을 뒤잇고 있습니다. 우리가 6절을 일종의 분수선으로 간주한다면 이 특정 진술이 어째서 이 지점에 오게 되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처음 세 복은 우리의 필요(need),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의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가난한 심령과, 우리의 죄성 때문에 애통함과, 인류의 삶을 파멸시킨 자아와 자아 중심성에 대한 참된 이해의 결과로서 온유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세 복은 우리의 깊은 필요 의식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 위대한 욕구 충족의 진술, 곧 하나님께서 이렇게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필요를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게 되며 하나님은 우리가 배부르게 채워질 것이라는 놀라운 대답을 가지고 오십니다. 이때부터 계속해서 우리는 만족의 결과, 곧 가득히 채워진 결과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긍휼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는 자가 됩니다. 그 후에는 이 모든 것의 결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게'됩니다. 이것이 본문에의 접근 방식입니다. 이것은 주리고 목마르는 데 대한 중심되는 진술로 유도되고, 이어 그 결과를 서술합니다. 처음 세 복에서 우리는 말하자면 산의 한 쪽 측면에 오른 셈입니다. 제4복에서는 정상에 오르며 그런 다음 다른 쪽 측면으로 내려가는 셈이 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밀접한 연관성이 하나 있습니다. 6절의 중심이 되는 진술에 뒤이어 오는 세 복은 이 6절의 진술을 인도하는 처음 세 복과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긍휼한 사람은 가난한 자들의 심령을 인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인식합니다.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이것은 긍휼하게 되는데 가장 중요한 필수 단계가 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를 갖게 되는 것은 자기에 대하여 이런 견해를 가질 때에만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심령이 가난하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존함을 인식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긍휼한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이 제2진술 '심령이 청결한 사람'은 첫째 그룹의 제2진술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와도 역시 부합된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들은 무엇에 관해 애통합니까? 그들의 심령 상태에 애통하며, 그들의 죄성 때문에 애통함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애통하는 것은 그들이 악행을 했을 뿐 아니라 악을 행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성격과 인격 중심에 도사리고 있는 타락성을 인식하였습니다. 그들을 애통하게 하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심령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진술과 부합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심령이 깨끗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보여 드린 대로 그들의 불결한 마음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들입니다.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여러분이 불결한 마음을 갖고 있음을 인식하고, 이것을 애통하는 것이며, 이것만이 마음이 깨끗하고 순결해지는 데로 유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똑같이 '화평케하는 사람'에 대해 논할 때도 화평케하는 사람은 곧 온유한 사람들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온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화평케하는 자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순서 문제로 더 길게 멈추고 싶지 않지만 순서가 우리 주께서 채택하신 이 배열에 담겨있는 뜻을 발견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세 단계를 필요순으로 취하게 됩니다. 그러면 욕구 충족에 이르게 되고 그런 다음 뒤이어 오는 결과를 보고 이 결과를 이 본문으로 인도되는 세 복과 부합됨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이 특정 지점(순서상)에 위치하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에 대한 이 놀랍고 영광스런 진술에서 강조된 것은 약속이 아니라 순결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주님께서 이렇게 정밀한 순서를 어째서 취하게 되셨는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의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여기서 가장 장중하고 엄숙하고 면밀한 탐사성있는 진술 하나를 대면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위치와 기독교의 가르침의 본질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관심사며,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을 살펴보면 최선의 방법은 다시 한번 여러 용어를 하나씩 검토해 보는 것이 됩니다.
물론 '마음'이란 말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반복해 말씀드리지만 여기에 복음의 특색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마음에 관계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모두 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주의 가르침에 관한 기록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내내 마음에 대하여 언급하고 계심을 아실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것을 강조하신 까닭은 틀림없이 바리새인들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이 항상 바리새인들을 크게 반대하신 까닭은 그들이 잔과 주발의 겉에만 관심을 가졌고, 속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겉만 보면 그들은 나무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종교의 외형에만 관심을 가졌고, 율법의 더 무게있는 것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잊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여기서 이 점을 크게 강조하십니다. 마음은 주의 가르침의 중심입니다.
이렇게 강조하신 사실을 잠시 부정적 관점에서 살펴봅시다. 주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주는 지적인 사람들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주의 관심은 마음에 있습니다. 환언하면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궁극적으로 교리의 이해와 지성의 문제일 뿐 아니라, 마음의 상태임을 다시 상기해야 합니다. 동시에 교리가 절대 중요하며 지적 이해가 절대 중요하며 이해가 사활로 중요하다는 점을 여기에 즉시 덧붙여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신조나 신앙에 대하여 지적인 종의에서만 끝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할 것은 당연하지만 무서운 위험은 우리가 여기서 멈추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문제들에 대하여 단순히 지적 관심만을 가지게 되었을 때 교회에 저주꺼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것은 교리와 신학에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순전히 기계적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만으로 만사가 잘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해석의 기술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순전히 학술적인 신학자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것은 본질적으로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머리의 문제이지만 머리의 문제만은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께서 외형과 행위 보다 마음을 더 강조하신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항상 삶과 의의 문제를 단지 행위와 윤리와 품행의 문제로 평가절하 시킬 태세가 되어 있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복음은 얼마나 우리 정체를 들추어내는 것이겠습니까! 지적인 면의 강조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제가 이 점을 먼저 강조할 때 '아멘'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매우 옳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삶이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조심합시다! 기독교는 주로 행위와 외적 품행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마음의 상태가 어떤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마음'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 용어에 대한 성경의 관용법에 의하면 마음은 인격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단순히 감동과 감정의 자리만은 아닙니다. 이 복이, 기독교 신앙은 원래 감정적이며, 지적이거나 의지적인 것이 아니라는 진술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세 가지를 포함합니다. 마음은 사람의 존재와 인격의 중심입니다. 마음은 다른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셈입니다. 마음은 지성과 의지와 감정을 포함합니다. 마음은 전인입니다. 마음은 우리 주님이 강조하신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표면뿐 아니라, 마음의 중심도, 마음의 온갖 활동의 근원이 순수한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마음은 이처럼 깊습니다.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복음은 항상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둘째로 본문은 마음이 항상 모든 문제거리의 자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셨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데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사기, 방탕, 질투, 배신, 모독, 교만, 어리석음 같은 것들이다' 지난 수백 년간의 비극적이며, 가공할 오류는 사람의 모든 문제가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과,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환경만 변화시키면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비극적인 오류였습니다. 이런 견해는 인류가 타락한 것이 낙원에서였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맨 처음 잘못되었던 것도 완전한 환경 속에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마음에서 나옵니다. 사람의 어떤 문제, 곧 결과가 비참하게 되는 모든 문제를 예로 들어 봅시다. 그리고 그 원인을 살펴봅시다. 여러분은 그것이 마음에서,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를 막론하고, 사람의 비열하고 무가치한 욕망에서 나오는 것을 항상 발견할 것입니다. 모든 문제거리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했습니다. 환언하면 복음은 이 모든 문제가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타락과 죄의 결과로 악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문제거리는 사람의 인격 중심에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지성을 발전시킨다고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교육만으로 선한 사람을 만들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최고 교육을 받고도 철저한 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지적 개발계획들만으로 사람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환경을 개선하려는 여러 수고만으로 개선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며, 지금 이 순간의 세상의 상태의 책임도 이것인 줄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에 있으며, 마음은 절망할 정도로 악하고 부패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용어를 살펴봅시다. 주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팔복이 얼마나 교리로 꽉 차 있는가를 다시 보십니다. 방금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내가 기독교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마음이 깨끗할 때에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본성으로 우리는 어떤 존재들인가를 방금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사람됨은 이것과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복음이 제의하는 것은 우리를 이 무서운 함정에서 하늘나라로 들어 오리려는 것입니다. 복음의 제의는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란 말을 정의해 봅시다. 주님은 '마음이 깨끗함'을 어떤 뜻으로 말씀하셨습니까? 이 말씀이 어쨌든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는 대체로 일치되고 있습니다. 한 뜻은 위선이 없다는 뜻이고 '성한'(single)이란 뜻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 산상설교 뒤에 가서 나쁜 눈에 대해 말씀하심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 눈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상한 것(singleness)과 일치됩니다. 이 말은 구김살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숨겨진 것이 없이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신실, 진실이란 말로 서술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일편단심, 곁눈팔지 않고, 골똘하는 전심이란 뜻입니다. 순결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저의 하나는 시편의 '일심'으로 주를 경외하게 하소서'입니다.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분할된 마음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난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마주 대하고 있습니까? 나의 일부는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고 찬양하려고 하나 다른 부분은 다른 것을 원합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이것을 어떤 방법으로 표현했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있으나 내 지체 속에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율법에 대항하여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 나를 사로잡아 가두는 것을 봅니다' 깨끗한 마음은 분할되지 않은 마음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에게 문제되는 것을 깨닫고 나서 하나님께 '일심으로 주를 경외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하나로 만드소서' '마음을 성하게 하소서. 진지하게 하소서. 건전하게 하소서. 하나되게 하소서. 어떤 위선에서도 벗어나 전적으로 성하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깨끗한'(청결한)의 의미는 이것뿐이 아닙니다. 이 용어는 동시에 '정화된' '흠이 없는'이란 뜻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7절에서 사도 용한은 곧 임할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가기로 허락된 백성들에 관해서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속된 것과 가증한 것과 거짓을 행하는 자는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들만 들어갈 것입니다'
계시록 22:14절에 '생명나무를 차지할 권세를 얻고 문을 통하여 도시로 들어가기 위하여 자기 두루마리를 깨끗이 빠는 사람은 복이 있다. 개들과 마술사들과 음란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사람은 다 밖에 남아있게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부정하고 불결하거나 더러운 흔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깨끗한 것은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으신' 완전하고 흠 없고 순결하고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면 완전한 표현이 되겠습니다. 이것을 더 분석해 보면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의 선으로 간주하며, 분할되지 않은 사랑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고만 관계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환언하면 마음이 깨끗한 것은 '가장 크고 으뜸 되는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이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이것을 축소시켜 말씀드리면, 우리는 모든 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이것이 우리 삶의 최고 의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를 알고자 열망하며 그를 사랑하며 섬기고자 소원하는 것입니다. 주는 이와 같은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진술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장 엄숙한 진술의 하나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히브리서에 이와 비슷한 어구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의 화평을 추구하고, 거룩해지기를 힘쓰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를 뵙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를 뵙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성경의 이 명백하고 분명한 진술을 가지고 있는 이상 거룩에 대한 설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거룩에 대한 이론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요 신약 성경적인 의미의 거룩 자체를 설교하는 것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거룩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보다 더 큰 어리석음이 또 있는지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을 보게끔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볼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것이겠습니까? 여기에 그 답이 있습니다. 곧 성결, 깨끗한 마음, 혼합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격하시켜 예의범절, 도덕, 또는 교리에 대한 지적 관심 정도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 안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영적 영역에서는 빛과 어두움을 혼합할 수 없으며, 검은 것과 흰 것을 혼합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Belial)을 섞을 수 없습니다. 이들 사이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주를 닮은 사람들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그의 존전에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기에 앞서 마음이 깨끗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도 장구한 교회사를 통해서 많은 글이 쓰였습니다. 교회 사상 위대한 교부들과 초기의 교사들은 이 문제에 끌려 이 문제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영화된 상태에서 이 육신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리라는 뜻입니까? 이 점이 그들에게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객관적이며 가시적인가, 아니면 순전히 영적인 것인가? 이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대답할 수 없는 문제로 생각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증거를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는 이러 저러한 것을 가리키는 것 같은 진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가 이것에 대해 많은 말을 할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세에게 있었던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느 때 하나님께서 그를 옆으로 불러 바위들 사이에 놓고 자기의 모습을 모세에게 보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등 부분만 비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보는 일이 불가능함을 암시합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나타나심(Theophany) 즉 언약의 사자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났던 일들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신체적인 의미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어느 땐가 백성들에게 '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은 일도 없고 그의 모습을 본 일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습'이 있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다. 그 사람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너희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나는 아버지를 보았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의 품 속의 외아들 하나님께서 그를 나타내 보이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 진술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땐가 주께서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진술 중 가장 비밀한 진술의 하나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말씀이 이러합니다. 이 문제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쓸데없는 일로 보입니다. 정확히는 모릅니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고 영원자이신 고로 이 문제에 대한 어떤 이해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이미 시초부터 실패할 운명을 띠고 있습니다. 경외감으로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적절한 신개념을 주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광 때문입니다. 사람의 용어는 너무 부적당하고, 우리의 깨달음은 한정되어 있고 유한하므로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서술하는 일에는 어쨌든 위험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이 영광스런 약속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고 암시드립니다. 다른 모든 복에 있어서와 같이 이 약속도 땅 위에서 지금 부분적으로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는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어떤 의미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역사의 일대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봅니다. 하지만 그는 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고도 할 수 있고, 그의 가까우심을 느낀다는 의미에서, 그의 임재를 누린다는 의미에서도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저 위대한 히브리서 11장에 모세에 관한 기록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보는 것 같이하여' 꾸준히 참았습니다. 이것은 그 일부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곳의 우리들에게도 가능한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비록 불완전해도 지금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보고'있습니다. 그분을 볼 수 있는 또 한 방법은 우리의 체험, 곧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은혜로운 교제 관계에서입니다. 이러 저러한 일로 우리가 우리 주의 손을 본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이것도 하나님을 보는 것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앞으로 하나님을 볼 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 속의 영상같이 희미하게 봅니다.' 우리는 이전에 본 일이 없는 양태로 보게 됩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게 될 것인지는 아직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그때 가서는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볼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장차 우리가 어떻게 될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를 닮은 자들이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때 우리는 그의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에게 이제까지 말씀된 가장 놀라운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의 온갖 문제와 두통거리로 눌림을 받고 있는 여러분과 제가 그 분과 얼굴을 마주 대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파악할진대 이것은 우리의 삶을 혁신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알현실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만왕의 왕의 존전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이 여러분에게도 사실임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보게 될 날이 오고 있음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거울 속의 영상같이 희마하게 말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파악하는 순간 다른 모든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의 영광스럽고 영원한 임재 가운데서 영원히 거하게 될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고 구속받은 자들이 주를 찬양하고 모든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 복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상상력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되기로 작정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들 앞에 놀라웁게 펼쳐 있는 이 영광을 빼앗기게 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부분적인 의미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이를 위해 작정되어 있음을 아십니까? 마음의 애착을 이것에 두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보이지 않고 영원한 것들을 보고 계십니까? 아직 기다리고 있는 이 영광을 묵상하며 시간을 보내십니까? 그러시다면 여러분의 최대 관심사는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어떻게 깨끗해질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에 수 세기를 통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온 대 주제가 다시 나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곧 승려가 되어 이 세상과 결별해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전임 직업'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만일 이 깨끗한 마음을 가지려 한다면 다른 일을 할 시간이 네게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도원 제도의 견해입니다. 이 문제를 논하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고, 제가 지나가는 길에 한 말씀 드리려는 것은 이것은 철저하게 비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나 제가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정화를 위한 이 온갖 노력은 실패할 운명을 띠고 있습니다. 성경의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있는바 모든 것은 우리의 타고난 마음이 검다는 것을 알고 다윗이 하던 기도에 참여하여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죠셉 하트] (Joseph Hart)와 함께 기도합시다.
마음을 정결케 하고 영혼을 성화하는 일은
당신의 일이요, 모든 부분에 새로운 생명을 부어 넣어
전체를 새로 만드는 일은 당신의 일이옵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에 끝에 가서 여러분의 마음은 시작할 때처럼 검거나 아니면 시작보다 더 검은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마음을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지어다.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정결한 마음을 가지는 오직 한 길은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깨끗케 하시는 일입니다. 오로지 그의 내주하심과 역사만이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있으며, 우리 속에 활동하셔서 우리로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여러분에게 의욕을 일으켜 일하게 하심으로'써 하십니다. 이것이 바울의 확신이었습니다. 즉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것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입니다. 이것이 저의 유일한 소망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분의 손 안에 있습니다. 이 일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저를 처리하고 계십니다. 저의 마음은 정결하게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손을 대셨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제가 흠 없이, 나무랄 데 없이, 점과 주름 없이, 오점 하나 없이 될 날이 오고 있음을 저는 압니다. 저는 깨끗지 않은 모든 것을 뒤에 남기고 거룩한 도성의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결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 문제에 대하여 수동적인 태도로 가만히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이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믿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야고보가 말한대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그가 여러분에게 가까이하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가까이하시기를 바라는 까닭은 만일 하나님께서 가까이하지 않는다면 제 마음은 검은 그대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어떻게 가까이하실까요? '하나님께 가까이 가시오. 그리하면 그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죄인이여, 손을 깨끗이 하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순결(깨끗)하게 하시오' 제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궁극적으로 제 마음을 정결하고 깨끗케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깨끗케 해 주실 것을 기다리면서 시궁창 같은 생활을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과 그 분이 이 일을 최종적으로 하셔야 함을 저는 압니다. 바울의 하신 말씀 '여러분 속에서 활동하시며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여러분에게 의욕을 일으켜 일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들을 죽여 보십시오' 여러분과 여러분의 목표 사이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처리하여 제거하십시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시 '영으로 육체적인 행위를 죽이면 살 것입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리려고 한 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시게 됩니다. 이사실은 여러분이 들어 볼 수 있는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보는 것이 여러분의 최고 목표요, 소망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리고 여러분이 복음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이런 희망을 두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순결하신 것과 같이 자신을 순결하게 합니다'란 말씀에 동의해야 합니다. 시간은 짧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큰 환영식이 가까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잔치가 준비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왕의 알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때에 여러분에게 아무 가치도 없고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게 될 일들로 시간을 낭비하고 계신 것이 이 순간 부끄럽지 않습니까? 시간의 피조물인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뵈려고 하며, 그의 영원한 영광 속에서 영원히 영원히 누리려고 합니다. 우리의 한 가지 계획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며 이것을 위해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순결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를 깨끗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