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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이야기, 그리고 자비교회의 첫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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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모든 가정에는 저마다 사연이 있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저 또한 이러한 각자의 가정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저는 남매입니다. 짧은 두살 터울인 오빠가 있었습니다.

어린시절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엄하고도 지혜로운 어머니에게서

엄하게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요.

북적대고 문제 많던 친가, 아버지는 거의 부재상태였고

가난은 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남매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였을까요.

그래도 어머니 덕분에 행복하고 즐거운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오빠는 착하고 순한 아이였지만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따뜻하고 인간적인 리더였습니다.

친가에서 할아버지, 작은아버지, 삼촌 세분이 알콜중독 환자였고

맏며느리인 어머니는 그 짐들을 거의 혼자 져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도 술은 정말 지긋지긋한 존재였습니다.

어머니는 술로 인해 생을 마감한 이 세 분의 장례를 치렀고

우리는 어깨 너머로 술의 위력(?)을 남일처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대학생이 된 오빠에게 비슷한 증상들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혐오했던 병이 우리 가족의 삶 깊숙한 곳으로 들어왔습니다.

남일처럼 느껴지던 그 일이 이제는 나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곁에 없었고 어머니는 착하고 순한 아들의 병에 깊은 절망이 찾아왔습니다.

 

자신에게 찾아온 이 증상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오빠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보려 애를 썼습니다.

설계를 전공하여 직장도 어디든 쉽게 구했지만 결국에는 술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깊은 시름 끝에 당뇨 합병증과 간경화로 일찍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20대 후반... 오빠와 제가 남았습니다.

성인이었지만 두려운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의 간병으로 오빠는 쳐다도 보지 않았던 그 시간동안 오빠가 어떻게 변해 있었는지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15년이 넘는 시간동안 서울,경기,충청권 안가본 알콜전문 병원이 없을정도로

오빠와 나는 긴 싸움을 싸웠습니다.

술로 인해 생기는 여러 문제들, 경찰서, 합의금, 병원비.. 경제적으로도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오빠의 병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병'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화가 나고 밉고 원망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오빠는 그냥 저에게 너무나 커다란 짐이었습니다.  

 

술로 인해 생긴 당뇨와 만성췌장염으로 오빠는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습니다.

마약성 진통제를 최대치 먹어도 효과가 없을정도의 통증입니다.

 

"그렇게 아픈데 술을 먹어야겠어?"

"......."

 

이 질문은 알콜중독 환자를 둔 가족이라면 누구나 해 봤을 질문일 것입니다.

아주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병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질문이지요.

알콜중독 환자들은 어느 것에든 쉽게 중독이 됩니다.

오빠는 마약성 진통제(옥시콘틴)와 수면제(졸피뎀) 중독도 생겼고 환각과 환청도 생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보석같은 의사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수원희망병원>의 성상경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분을 만나고 나서야 약 중독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십수년의 반복된 병원생활에 진저리가 난 오빠는 병원을 나와

위태한 자립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도 모험이었지만

오빠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이라 생각하여 끝까지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오빠는 자비교회의 첫 성도였습니다.

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부터 함께했습니다.

그 때 오빠는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고백을 했고

처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A.A.모임에 나가고 돈을 아끼기 위해 먼 거리를 걸어다니고

병원을 여러군데 다니면서 병과 싸웠습니다.

정말 "싸웠다"는 표현이 맞았습니다.

그것은 일반 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싸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같은 알콜환자들 뿐이었습니다.

A.A.모임에 참석해서 이분들의 이야기를 듣고있자면 그냥 눈물이 납니다.

병이 생기면서 인기 많던 오빠의 친구들은 하나 둘 떠나갔지만

마지막에 오빠 곁에는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새로운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극심한 불면과 여러 통증들로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며

먹는 약이 하루에 수십개였던 오빠는

지난 5월 14일 집에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경련하고 있는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다음날이 이사여서 금요일에는 남편과 가서 짐정리를 도와주고, 토요일에는 제가 가서 함께 짐을 싸고

오빠가 좋아하는 두부로 찌개를 끓여주고 먹는 것 보고 나왔는데

그것이 마지막 식사였습니다.

악성신경이완증후군

생각도 못했던 병명이었습니다.

연락이 안되어 주일 저녁에야 발견해서 너무 미안했는데

오빠를 조금 더 늦게 발견했더라면 이미 사망했을 것이라 했습니다.

처음에는 뇌출혈이나 뇌염을 예측했는데 여러 검사결과 뇌에 이상은 없다 해서 다행이다 했는데

오빠는 의식없이 계속 강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빠가 마지막 뒷정리를 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중환자실에서 한달여 시간을 보내고 요양병원에서 일주일 보내는 동안

결국 깨어나지는 못했지만 매일 아침저녁으로 남편과 저, 그리고 아이들이 찾아가

얼굴 보고 만져보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타이밍은 언제나 놀랍습니다.

마지막 얼마간은 제가 마음이 많이 약해져 남편이 혼자서 매일 병원에 찾아가 기도해주고

여기저기 주물러주고 오는 수고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3주정도 지났을 때 기적처럼 오빠가 저와 남편을 알아본다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주 잠깐, 남편과 저는 그것이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던 모양입니다.  

2017년 6월 25일 주일 오전 11시30분

오빠는 조용히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었습니다.

임종순간에 A.A.모임 친구 두분이 동석했습니다.

 

남편과 저는 오빠가 의식이 없는 동안에는 장례를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깨어날거라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영구적인 장애가 생기는 경우를 대비해

전동휠체어를 알아보고 장애인복지를 알아보는 등

다음단계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중환자실에서 각종 약으로 버틸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좋아해서 외로움을 많이 타고 그리움이 많았던 오빠.

교회에서는 오빠가 소천한 주일에

오빠를 안치실에 안치하고 나서

온 성도들이 함께 교회에서 예배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빈소 없이 정말 오빠를 사랑했던 몇몇 친구들만 참석하고

가족은 저희 네식구와 어릴 때 오빠를 키웠던 이모, 큰형님과 조카만 함께 조촐히 치렀습니다.

우리나라 장례문화와 교회에서 치르는 장례에 대해 여러 고민과 조언을 찾아본 후 내린 결정입니다.

함께 기도해 오신 분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감사인사를 드렸습니다.

조의금을 일절 받지 않겠다 하였는데도 보내주신 정성들이 모여

참 놀랍게도 오빠의 병원비며 모든 장제비가 채워졌습니다.

 

오빠는 이제 주님 곁에서 정말 편안히 쉴 것입니다.

수십알의 약을 먹지 않아도 통증이 없고 맑은 정신으로 주를 볼 것입니다.

그것이 저에게 너무나 큰 위로이고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그것이 소망입니다.

 

오빠는 남편과 저에게 선생님이었습니다.

오빠를 통해 하나님께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인간적이고 부족한지도 알게 하셨고

오빠와 같은 병을 가진 연약한 이들에 대해 조금은 더 가까워졌습니다.

우리는 정도만 다를 뿐 모두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손가락질 할 만한 자격이 없는 부족한 죄인입니다.

차별없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병든 자에게 필요한 의원이 되시는 주님의 한없는 은혜를

오빠를 통해 더 가까이 느낍니다.

 

매일 퇴근할 때쯤 전화를 해서 오늘은 뭐했고 내일은 뭐할거고

무엇을 먹었고 병원은 어디를 갔었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던 오빠의 전화가 오지 않던 그날부터

저 또한 너무나 다른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남편도 저도 어디엔가 있을 것 같은 오빠를 

건강한 새 몸으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아직 많은 것이 낯설지만

저에게는 또다른 날들이 숙제처럼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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