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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22일,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 별세,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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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 “C. S. 루이스, 우리는 진흙 파이나 만들며 놀고 싶어 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오늘은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가 별세한 날입니다. 1963년 11월 22일 금요일 오후 5시, 심장과 전립선, 신장에 문제를 안고 지내던 루이스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십대 때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로 살던 루이스는 옥스퍼드 모들린 대학에서 가르치던 중 회심을 경험합니다. 이후 그는 기독교 작가이자 변증가로서 활동하며 ‘회의론자의 사도’로 불렸습니다. 루이스는 저교회파 영국성공회 성도였지만 그의 글에는 보편적 교회가 주의를 기울일만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자기부인(self-denial)에 대해 많이 말하지만, 자기부인 자체를 목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좇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뒤따라오는 바람직한 결과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자신의 행복을 갈망하고 간절히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현대인의 사고에 도사리고 있다면, 그것은 칸트와 스토아 학파의 사상에서 스며든 것이지 기독교 신앙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복음서가 당당하게 약속하는 보상, 그 엄청난 보상들을 생각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의 갈망이 너무 강하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약하다고 말씀하실 듯합니다. 우리는 무한한 기쁨을 준다고 해도 술과 섹스와 야망에만 집착하는 냉담한 피조물들입니다.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자고 말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상상하지 못해서 그저 빈민가 한구석에서 진흙 파이나 만들며 놀고 싶어 하는 철없는 아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합니다. C. S. Lewis, The Weight of Glory, 홍종락 역, 『영광의 무게』 (서울: 홍성사, 2008), 12.

나는 루이스의 글에 나오는 연옥과 림보(구약의 성도들, 죽은 갓난아이들 및 정신박약자가 머무는 곳)에 대해 의아해합니다. 또한 그와 무어 부인과의 관계, 그가 말년까지 경제적 문제로 고심하는 모습 등을 보며 친근감과 연민을 느끼기도 합니다. 루이스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상상력과 유머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마귀는 늘 진지합니다. 웃음이 없지요. 하지만 성도는 고난 중에서도 즐거워합니다. 배반한 이를 위해 죽임을 당했으나 다시 살아난 아슬란과 다시 봄을 누리는 나니아. 우리는 그곳에서 노래하는 군병입니다.

“당신들이 지나왔던 지혜의 골짜기라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동쪽으로 가는 중이니까, 림보 혹은 깜깜한 구덩이의 입구라고 하는 편이 낫겠군요.” “저기엔 누가 살고 있지요?” 존이 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지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살고 있지요……영혼 깊숙한 곳에 순수한 욕망이 살아 있으면서도……자만심이나 나태함 혹은 소심함 때문에, 욕망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끝까지 거부하고 있지요. 욕망을 달성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신들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종종 엄청난 고행을 하기도 하구요.”……“지주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고통을 주신다는 게 좀 가혹하지 않을까요?” “저는 단지 들은 대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안내인이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이란, 지주님께서 당신의 종족들에게 주신 것이지 저의 종족들에게 주신 게 아니니까요. 제가 산 위에서 사는 사람들의 비밀을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당신도 고통이란 것을 제게 설명해 주기가 힘들 겁니다.” C. S. Lewis, The Pilgrim's Regress, 『순례자의 귀향』 (서울: 보이스사, 1985), 3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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