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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1년 12월 2일, 얀 반 뤼스브룩(Jan van Ruusbroec, 1293 or 1294–1381) 별세,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 신비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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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얀 반 뤼스브룩, 관상이 초자연적이라 해도 애덕의 활동 없인 아무 것도 아니다.”

오늘은 얀 반 뤼스브룩(Jan van Ruusbroec, 1293 or 1294–1381)이 별세한 날입니다. 1381년 12월 2일, 플랑드르(Flanders)의 성인이라 불리는 뤼스브룩은 브뤼셀 부근 그로넨달(Groenendael)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영성 작가였던 그는 하나님이 영원히 쉬고 또한 영원히 활동하는 분이시며, 끝없이 흘러나오고 흘러 들어가는 바다와 같다고 했습니다. 뤼스브룩은 중세의 탁월한 자국어 신비 신학자였습니다. 스콜라신학을 공부한 사제였던 그는 영적 여정의 진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반응이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뤼스브룩은 하나님을 지향하지 않고 자신만을 지향하는 ‘자유정신’ 이단을 정죄하며 비판했습니다.

뤼스브룩은 「영적 결혼」(The Spiritual Espousals)와 「빛나는 돌」(The Sparkling Stone)에 여정의 지형을 네 단계로 표시했다. 첫째로, 마르다는 외적 행위를 지향하는 “활동적 삶”의 전형이다. 이는 여정 중인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주의하고 교회의 훈련에 따르며 덕을 익히는 단계다. 둘째로,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사랑과 의지로 마음속에 하나님을 추구하는 “내면의 삶” 또는 “갈망하는 삶”의 전형이다. 셋째로, “관상의 삶”에서는 여정 중인 사람이 은혜로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합과 교감에 도달하여 풍성한 영광을 누리게 된다. 끝으로, “선교적 삶”은 그리스도인이 외면의 여정에 올라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길 때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자 안식하시는 분이므로,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이 하나의 동일한 경험에 안식과 활동을 둘 다 지니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 이 수준의 의(義)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Burce Demarest, Seasons of Soul, 윤종석 역, 『영혼의 계절들』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3), 208.]

그는 애덕(caritate)의 활동 없는 관상(contemplatio)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 신비주의를 비판했습니다, 우리는 자신과 세상에 착념하지 않고, 성경에 마음을 쏟습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외부세계와 내면을 해석합니다. 뤼스브룩이 강조점, 즉 나의 경건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는지 점검합시다. 혹 피상적인 열정으로 보여주기식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사랑이 이웃 섬김으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뤼스브룩의 두 번째 길은……“비움”의 전략을 통해 신의 형상을 지닌 “신의 자연적 영역”으로서의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영혼의 그 본질은 신 안에 달려 있고 또 영혼의 모든 활동이 그 안에서는 정지하게 된다. 『왕국』(269-306)에서, 뤼스브룩은 이 길 즉 ‘자연적 관상’과 관련하여 영혼의 상위 부분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기술하면서 ……궁극의 결과로서의 종교경험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설명한다……그의 설명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한……원리인 ‘유출-복귀’에 기초한다. 영혼의 상위인 힘들인 기억, 지성, 그리고 의지는 영혼의 본질로부터 유출되어 나왔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원천이며 “자연적 쉼”인 그 본질 안으로 복귀하려는 “자연적 경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뤼스브룩에게 이것은 관상의 경험 안에서 체험될 수 있는 실재였다. 활동의 비움을 통해 정신이 영혼의 본질을 향하면 이 힘들이 자신들의 원천인 영혼의 본질로 복귀하여 들어가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박병관, “얀 반 뤼스브룩의 신비신학의 형성”, 『종교연구』 제 60집(2010년 가을),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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