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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12월 2일, 이길함(李吉咸) 별세, “통회의 울부짖음은...성령의 임재에 압도되어 넘쳐 흐르는 찬양의 물결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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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오늘은 이길함(李吉咸)이 별세한 날입니다. 이길함의 본명은 그래함 리(Graham Lee, 1861- 1916)입니다. 1892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1912년에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4년 후, 1916년 12월 2일 캘리포니아 길로이(Gilroy)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길함 선교사를 주목해 보는 첫 번째 이유는 그가 길선주에게 세례를 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길선주는 구도자로서 여러 종교를 전전하다가 친구 김종섭에게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1897년 8월 15일, 이길함 선교사는 길선주에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후 길선주는 조사(助事)와 장로로서 섬기다가 평양대부흥의 주역으로 쓰임 받았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목사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째, 이길함 선교사는 교육 사업에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1897년, 그의 집(평양 신양리 26번지)에 소학교가 세워졌는데, 이는 후에 평양 숭의여학교로 발전했습니다. 1901년 봄, 평양신학교가 개교했을 때 그는 교회역사와 신구약주해, 성례와 교회정치 등을 가르쳤습니다. 교수 2명과 학생 2명은 마포삼열 선교사의 집에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는 이렇게 알려줍니다. “복음 선교할 교역자 양서의 필요를 감(感)하고 1901년에 목사 후보자 2인을 선택하여 성경문답으로 시취한 후 5년제로 과목을 작정하여 선교사 마포삼열, 이길함 양씨가 분담교수하게 하고……1902년에 제1회로 김종섭, 방기창 2인에게 교수한다.”[탁지일, “방기창 목사의 목회 리더십”, 『장로교 최초 목사 7인 리더십』 (서울: 쿰란출판사, 2010), 20-21.]

셋째, 이길함 선교사는 장대현교회의 담임목사로서 평양대부흥의 한복판에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1907년 1월 14일 월요일,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 저녁 집회에는 1,500명 가량의 사람이 모였습니다. 이길함 선교사가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는 회중에게 통성기도할 것을 요청했고,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2시까지 장대현교회 예배당은 통곡와 참회의 기도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이길함은 “통회의 울부짖음은 설움의 폭발이라기보다는 성령의 임재에 압도되어 넘쳐 흐르는 찬양의 물결과 같았다.”라고 보고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길함 선교사는 전도자였습니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된 그는 평양에서 강계까지의 여행을 감행합니다. 그 지역 겨울사경회를 지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320km가 넘는 긴 거리와, 영하 20도의 혹독한 날씨도 전도자의 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썰매와 가마, 도보로 얼어붙은 강을 건너고, 언덕배기 시골길을 통과했습니다. 그의 유머감각은 어려움 속에서도 시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한국, 서울에서 평양, 평양에서 강계까지의 선교여행은 감동을 줍니다. 하늘보좌에서 구유까지 내려오심이 얼마만큼 우리에게 큰 의미와 감동으로 다가오는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희생 앞에서 자신의 수고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주여, 예수님의 겸손을 깊이 생각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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