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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2월 5일, 옥한흠(玉漢欽, 1938-2010) 출생, "저는 세상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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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옥한흠, 제자훈련 착실히 해서, 한 사람이라도 주님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겠다.”

오늘은 옥한흠(玉漢欽, 1938-2010)이 출생한 날입니다. 1938년 12월 5일, 옥한흠 목사는 경상남도 거제에서 아버지 옥약실과 어머니 이희순의 큰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에 중생을 체험한 그는 성균관대학교와 총신대학교 신대원에서 수학했습니다. 옥한흠은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제자훈련을 실험하여 성공을 거둔 후 도미하여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1978년에 강남은평교회(후에 ‘사랑의교회’로 개칭)를 개척한 그는 광인(狂人)정신으로 제자훈련에 집중했고, 한국교회의 갱신과 일치를 위해 일했습니다. 옥한흠은 설교 준비와 전달을 위해 진액을 쏟는 목회자로 초교파적인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65세에 조기 은퇴하였습니다.

칼빈에서 공부를 마치고 본래 계획했던 3년 중 남은 1년간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옮겨 공부하기로 했다……변함없이 제자훈련에 대한 신학적인 이론을 정립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그러나 그 곳 역시 실천신학 분야에서는 생각보다 취약했다……그때 내게 결정적인 전기를 가져다 준 사건이 발생했다. 구내 서점에서 한스 큉의 『교회론』을 발견한 일이다. 그 책을 뽑아 몇 페이지 읽는 중에 “아, 이것이구나!”하는 탄성과 함께 내 마음에 한 줄기의 밝은 빛이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교회론에 관한 한 그의 책은 놀라운 역작이었다. 큉은……사도성이 무엇인가를 명료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에 의하면 모든 평신도는 사도의 계승자로서 예외 없이 세상으로 보냄 받은 예수의 제자요, 소명자라는 것이다. 큉 덕분에 내가 왜 평신도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깨워야 하며, 이것을 나의 목회 철학으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해 확고한 신학적 답을 얻게 되었으니 그때의 환희를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옥한흠, 『제자훈련 열정 30년, 그 뒤안길의 이야기』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06), 44-45.]

그가 별세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섣부른 평가는 금물입니다. 옥한흠은 제자훈련의 창시자가 아닙니다. 성도를 온전한 이로 세우는 것은 보편적 교회가 마땅히 힘써야 할 바입니다. 그는 복음전도자이자 강해설교자였습니다. 연약한 교우에게는 따뜻하고, 게으른 교역자에게는 엄격했습니다. 어쩌면 옥한흠 목사 스스로의 평가처럼, 그의 한 사람 목회철학과 너무나 커져버린 사랑의교회는 엇박자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한 사람을 귀히 여깁시다. 인내하며 세웁시다.

저는 소문난 교회의 목사가 된 것을 굉장한 불행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큰 교회가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제자훈련 착실히 해서, ‘한 사람이라도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평신도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지금까지 25년을 걸어 왔는데,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공간도 없는 교회에 자꾸 사람을 보내 주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솔직히 싫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많아질수록 한 영혼에 대한 가치가 자꾸 제 눈에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칭찬을 많이 듣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싫습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상 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오면 상이 없다”……짐 엘리엇은 스물여덟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우카 족 하나를 구원하려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이 주님 앞에 가서 받을 상하고 제가 받을 상하고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나중에 주님 앞에 가면 벌거숭이가 될 확률이 큽니다.[옥한흠,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05), 2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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