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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 12월 16일,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출생, "아버지 없는 여관집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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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6일 “조지 휫필드, 저는 ‘회심자’라는 이름을 너무 빨리 주지 않으려 합니다.”

오늘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가 태어난 날입니다. 1714년 12월 16일, 휫필드는 글로스터(Gloucester) 지방의 여관집 아들로 출생했습니다. 6남 1녀 중 막내였던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돕던 중 옥스퍼드 펨브로크 칼리지에 들어갔습니다. 휫필드는 웨슬리 형제가 중심이 된 홀리클럽에 가입하여 경건생활에 힘쓰던 중 헨리 스쿠걸의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읽고 중생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공로와 열심히 아닌 은혜의 교리를 붙든 휫필드의 회심은 결코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순절이 다가왔다……한 손의 일부가 완전히 얼어 까맣게 될 때까지 추운 아침에 계속해서 밖을 거닐었다. 금욕과 내적 투쟁으로 몸은 수척해졌다. 수난주간에는 계단을 기어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다……병은 7주 동안 계속되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방문인가! 복된 성령께서는 이 기간 내내 내 영혼을 정결케 해 주셨다. 내 안에 집을 짓고 있던 추잡함과 악명 높았던 죄악들, 심지어 내 마음의 죄까지 기억나게 하셨다. 나는 그러한 일들을 즉시 적었고, 아침저녁으로 하나님 앞에 고백했다……어느 날, 유난히 목이 타고 입에서 불쾌한 단내가 난다는 것을 느끼고는 갈증을 없애려고 이것저것을 시도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때,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라고 소리 지르셨을 때가 시험이 거의 끝날 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엎드려서 “내가 목마르다! 내가 목마르다!”라고 소리 질렀다. 머지않아 그토록 무겁게 나를 짓누르던 짐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느끼게 되었다.[George Whitefield, Journals, 엄경희 역, 『조지 휫필드의 일기』 (서울: 지평서원, 2002), 63-65.]

휫필드는 탁월한 설교자였을 뿐 아니라, 해외 선교사이자 칼빈주의 메서디스트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13번이나 대서양을 횡단하며 복음을 전했고, 존 웨슬리보다 먼저 칼빈주의 감리교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웅변적인 설교를 직접 들을 수 없으나, 휫필드의 사역을 더듬으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령의 열정, 선교에의 헌신, 소그룹 및 권면의 강조는 휫필드가 견지했던 개혁파 신앙의 특징입니다. 바른 교리가 바른 실천으로 열매 맺고 있습니까?

어떤 이들은 율법을 설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율법을 말하지 않고는 복음을 설교하지 못할 것입니다……사람들에게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고는 그들이 '어떻게 구원받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취하시는 방식은 농부가 땅을 준비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농부들이 먼저 땅을 갈지 않고서 이듬해에 곡식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한 영혼이 파멸에 길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런 갈지 않은 땅에서 은혜의 곡식을 거둘 수 있으리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그들은 율법이 주는 죄의 자각을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최근 들어서 30년 전과 달리 사람들에게 ‘회심자’라는 이름을 너무 빨리 주지 않으려 합니다. 사람들이 열매를 맺기까지 좀 더 기다려 봅니다. 3월의 강한 바람에 날려 흩어져 버릴 꽃송이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잠시 더 기다려보는 것이 회심자들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George Whitefield, Sermons on Important Subjects, 서문강 역, 『하나님의 사람을 입은 사람들(휫필드 설교 시리즈 5)』 (서울: 지평서원, 200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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