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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12월 21일, 유화례(Florence E. Root) 출생, ‘광주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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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 “유화례 선교사, ‘남자를 좀 삶아 주시오.’”

오늘은 플로렌스 루트(Florence E. Root, 1893-1995, 한국 이름 유화례[柳華禮])가 태어난 날입니다. 1893년 12월 21일, 유화례는 미국 뉴욕 주 쿠퍼스타운에서 출생했습니다. 스미스대학에서 수학한 그녀는 한 부자의 비서로 일하던 중 부흥집회를 통해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유화례는 성경학교에 다니면서 한국에 대해 듣게 되었고, 1927년에 남장로교회 선교사로 내한했습니다. 그녀는 신사참배 압력, 폐교, 일경의 감시 속에 어려움을 겼었고, 한국 전쟁 시에도 귀국하지 않고 지게에 실려 피난을 갔으며, 76일간 동굴에서 지내는 등 고초를 겪었습니다.

생소한 한국 땅에 발을 디뎠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던 시절, 학교 문을 닫게 할 수 없다고 우리 집 마당을 점거하고 밤새 추위에 떨던 귀여운 딸들, 신사참배로 학교 문을 닫고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돌아가던 때의 쓰라림 이 모두가 생생한 엊그제 일 마냥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수피아의 딸들, 맑고 고운 마음씨를 간직한 수피아인들은 이제 가는 곳에서 훌륭히 자라고 있다. 교회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고아원에서 모든 사람의 빛이 되어 바른 길을 비춰주고 있다. 새삼 나는 수피아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내가 할 일을 다 했는가?’ 자문해 보았다. 보다 더 훌륭한 수피아인으로 열심히 했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다. 한국의 농촌은 얼마나 순박했던가. 가는 곳마다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 고난을 겪었으나, 나는 한국인들이 좋다. 경찰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내가 나타나기를 바라던 시골교회 교인들, 털모자를 쓴 나를 보자 도망하던 아낙네, 모든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고 있을 것이다.[유화례 글, 안병로 엮음, 『한국 선교와 전라도 선교의 어머니 유화례』 (서울: 쿰란출판사, 2013), 172-73.]

사람들은 광주에서만 51년을 사역한 유화례를 ‘광주의 어머니’로 불렀습니다. 그녀는 은퇴 후에도 한국에 남아 자비량으로 봉사했고,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이 땅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미국에 건너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역 초기에 유화례는 ‘감자를 삶아달라’를 ‘남자를 삶아달라’고 잘못 말하여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뒤에도 한국에 돌아갈 날을 기다렸습니다. 해방이 되자 유화례는 여전히 불안정한 이 땅에 돌아와 겸손히 섬겼습니다.

유화례 선교사는 공식적으로 1963년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마치고 은퇴했다. 그는 여느 사람처럼 고국으로 돌아가 편안한 말년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더 이상 봉급이 주어지지 않음에도 1978년, 그의 나이 여든다섯까지 이 땅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섬겨야 할 일을 부지런히 찾았다. 은퇴 후 잠시 목포에서 정명여학교 교장직을 수행한 일 말고는 전라남도 섬 지방을 다니며 전도인(傳道人)으로 살았다. 당시에 섬 지방에 변변한 숙박 시설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목포에서 나룻배를 타고 크고 작은 섬들을 찾아다녔다……자신을 위해서는 철저히 돈을 아끼고, 심지어는 집으로 배달되는 카드 샘플조차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 이를 재활용하며 근검절약하는 삶을 살았다. 반면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 대하여서는 한없는 자비를 베풀었다. 자신이 받은 봉급의 대부분을 군산에 사는 양딸 정금순, 김천배 부부가 운영하는 군산보육원에 보내 주었다. 고창의 행복보육원도 그가 돌보는 시설이었다.[양국주, “전남지역 전쟁고아 돌본 광주의 어머니”, 월간 조선 2014년 11월호, 5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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