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본카테고리

1563년 12월 29일,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옹(Sebastien Castellion, 1515–1563)이 별세, "양심과 사상의 자유, 종교적 관용을 주장한 최초의 개혁파 중 한 사람"

반응형

12월 29일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옹, 육체의 검은 영혼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오늘은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옹(Sebastien Castellion, 1515–1563)이 별세한 날입니다. 1563년 12월 29일, 카스텔리옹은 바젤(Basel)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학생 시절에 스크라스부르의 칼빈 자택에서 머물기도 했던 그는 제네바 중등학교(college) 교장으로 임명받을 만큼 실력 있는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카스텔리옹은 아가서의 정경성을 부인(방탕한 연애 기록으로 여김)한 것 등으로 인해 쫓겨나고 맙니다. 그는 출판사에서 교정일을 보다가 1553년부터 바젤대학에서 헬라어를 가르쳤습니다. 카스텔리옹은 세르베투스의 처형 후, 『이단론』을 익명으로 출판하여, 비정통주의자들을 무력으로 박해하는 것이 부당함을 지적했습니다.

오, 군주들이여, 종교 때문에 피를 흘리도록 당신들을 유혹하는 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마십시오……주님께서 당신들에게 주신 칼에 만족하십시오. 반역자와 거짓 증인들과 같은 이들을 처벌하시오. 그러나 종교에 있어서는 악한 자들의 위협으로부터 선한 자들을 보호하시오. 이것이 당신들의 임무입니다……칼이 예술들을 지탱해 줄 수 없는 것이라면 말씀과 영에 존재하는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의사가 위정자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의견을 옹호할 수 있다면, 신학자는 왜 그렇게 할 수 없습니까?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실 수 있었고 사도들도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들의 제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검으로 육체를 보호하십시오. 이 검은 영혼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지혜롭게 되어 적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십시오. 그렇지 못하면 내가 단언하건대 경솔하게 사람을 죽이는 당신들 모두가 비참하게 멸망당할 때까지 폭동과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Sebastien Castellion, De haereticis, an sint persequendi, 박건택 편역, 『종교개혁사상선집』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2001), 344.]

카스텔리옹은 비참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강가에서 나뭇가지를 주어 불을 지피고,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도둑질도 했습니다. 그는 위경련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종종 ‘칼빈의 대적자’로 일컬어지는 카스텔리옹은 양심과 사상의 자유, 종교적 관용을 주장한 최초의 개혁파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분명 시대보다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스어에 능통했던 그는 신학자로서 성서를 너무 자유분방하게 해석하여 후원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결국 목사로 임용되지 못했다. 카스텔리오는 바젤로 근거지를 옮겨 가난에 시달리다가 겨우 바젤 대학의 그리스어 교수로 발탁되었다. 여느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예정설과 삼위일체설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여야 했는데, 삼위일체설과 관련하여 그는 칼뱅파가 세르베투스를 처형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이때 벌인 논쟁에서 제기된 중요한 문제가 “이교도를 탄압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었는데 카스텔리오는 같은 제목으로 글을 써서 발표했다. 물론 그는 탄압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지었다. 이때가 1554년이었다. 그는 성서를 고스란히 처음에는 고전 라틴어로, 나중에는 서민들이 쓰던 살아있는 프랑스 구어로 번역하기도 했지만, 탄압을 위해 늘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가난에 쪼들렸다. 나중에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이는 몽테뉴는 『에세』에서 그의 공로를 기렸다.[Jacques Barzun, From dawn to decadence: 500 years of western cultural life, 이희재 역, 『새벽에서 황혼까지 1500-2000 1(서양문화사 500년)』(서울: 민음사, 2006), 86.]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