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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월 14일, 우에노 다끼(上野, Takiko, 1878-1950) 별세, “한국 고아들을 위해 헌신한 일본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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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4일

“한국 고아들을 위해 헌신한 일본 여인”

오늘은 한국 고아들을 위해 헌신한 일본 여인 우에노 다끼(上野, Takiko, 1878-1950)가 별세한 날입니다. 1950년 1월 14일, 해방 후에도 한국에 남아 고아들을 돌보던 우에노 다끼는 그 남편의 평가처럼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봉사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녀는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우에노 다끼는 그녀의 남편 소다 가이찌와 함께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지공원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입니다. 그녀는 30세 때 소다 가이찌와 결혼했는데, 그 때 소다의 나이는 41세였습니다. 소다는 41년간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 고아들을 위해 봉사했고,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 문화훈장을 받은 사람입니다. 과거에 소다는 방탕한 삶을 살았으나 우리나라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결혼 후 아내 우에노 다끼를 통해 그 신앙이 견고하게 되었습니다.

우에노 다끼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18세 때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기독교 학교를 졸업하고 즉시 한국에 와서 히노데 소학교의 교사로 있다가 숙명여학교와 이화여학교의 영어 교사로 지냈던 여성이다. 우에노 다끼를 만나게 된 다음부터 소다는 새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지독한 음주벽을 완전히 청산하고 금주회 회장까지 되었다. 소다는 입버릇처럼 “나는 젊을 때 대주가였으며, 혈기왕성하여 난폭한 짓을 많이 하는 불량배였다”라고 했는데 사실 그는 술 때문에 여러 번 죽을 뻔했고 우리나라에 오게 된 동기도 따지고 보면 술 때문이었다. 그러던 사람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YMCA 일본어 교사로 있는 동안, 종교 집회에 자주 참석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전택부, 『양화진 선교사 열전』 (서울: 홍성사, 2009), 173-74.]

1926부터 가마쿠라 보육원의 보모가 된 우에노 다끼는 1943년부터 1947년까지 남편 없이 보육원을 운영해야 했습니다. 소다가 원산감리교회에서 무보수 전도사로 사역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재회한 부부는 곧 헤어져야 했습니다. 남편 소다가 조국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다 가이찌가 한 손에는 성경책, 다른 한 손에는 ‘세계평화’라는 표어를 들고 전국순회행진을 하는 동안 우에노 다끼는 서울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반일감정의 분위기가 지배적이지만 한국을 사랑했던 일본인 성도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원합니다. 그들은 사는 동안 일본과 한국 양측의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 겨울, 그들의 묘지 앞에 서서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묵상해보기를 권합니다. 고맙습니다, 우에노 다끼.

1921년, 소다는 가마쿠라 보육원의 경성지부장이 되어 고아의 구제를 시작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불황, 식민지 정책에 의한 수탈로 고아들의 굶주림은 늘어만 갔고 자금은 바닥나 폐원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느 날 현관 앞에 1,000엔이 들어 있는 종이 꾸러미가 놓여 있었고, 소다 부부는 이 익명의 자금에 용기를 얻어 종전까지 1천 명이 넘는 원아를 돌보았다. 종전 후에 일본인에게는 철수 명령이 내려졌으나 소다 부부에게는 영주권이 주어졌다.[고바야시 게이지, 『(일본인의 눈으로 본) 한일 역사의 현장』 (서울: 시간과공간사, 2006), 2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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