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 (저녁의 묵상)
○ 제목: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 요절: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단 9:26)
그분의 이름을 송축하십시오. 주 안에는 죽음의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죄도 그분을 더럽히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망(死亡)은 주님에 대하여 아무런 청구권도 갖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분으로부터 그의 생명을 정당하게 취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어떤 사람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어떤 사람도 그분이 그 자신을 일부러(의식적으로) 죽음에 넘겨주지 않는한 강제로(억지로) 그분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목하십시오! 한 사람이 죄를 짓고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습니다. 공의(Justice)가 우리의 범죄에 의하여 손상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의는 그의 만족을 그분(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눈물의 강들, 제물의 산들, 황소 피의 바다, 유향의 언덕들은 속죄(죄의 제거)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베어졌습니다(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진노의 이유는 당장에 끊어졌습니다(제거되었습니다).
죄는 영원히 치워졌습니다. 사랑이 구속주로 하여금 그분의 원수들에게 그분의 생명을 내놓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의 범죄를 위하여 순결한 피를 흘리시는 광경에 대해 우리가 감탄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그 효과를 확실히 실감해야 합니다. 메시야의 죽음의 목적은 그의 교회의 구원이었습니다. 주께서 속죄금(대속물)으로서 그의 생명을 주신 사람들 중에 우리는 한 부분으로 속해 있습니까? 주 예수께서 우리의 대표자(대리자)로 섰습니까? 우리는 그의 상처(채찍맞음)에 의하여 치료되었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분의 희생 제사에서 한 몫을 차지 못한다면(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매우 두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을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 예수님은 현재의 구세주입니다. 그들 위에는 모든 화해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메시야의 죽음의 공로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은 주님을 기억할 때마다 기뻐하십시오. 그들의 거룩한 감사가 주님을 위하여 그들을 완전한 헌신에로 인도하게 하십시오.
Evening
"The Messiah shall be cut off, but not for himself."
Daniel 9:26
Blessed be his name, there was no cause of death in him. Neither original nor actual sin had defiled him, and therefore death had no claim upon him. No man could have taken his life from him justly, for he had done no man wrong, and no man could even have lain him by force unless he had been pleased to yield himself to die. But lo, one sins and another suffers. Justice was offended by us, but found its satisfaction in him. Rivers of tears, mountains of offerings, seas of the blood of bullocks, and hills of frankincense, could not have availed for the removal of sin; but Jesus was cut off for us, and the cause of wrath was cut off at once, for sin was put away forever. Herein is wisdom, whereby substitution, the sure and speedy way of atonement, was devised! Herein is condescension, which brought Messiah, the Prince, to wear a crown of thorns, and die upon the cross! Herein is love, which led the Redeemer to lay down his life for his enemies!
It is not enough, however, to admire the spectacle of the innocent bleeding for the guilty, we must make sure of our interest therein. The special object of the Messiah's death was the salvation of his church; have we a part and a lot among those for whom he gave his life a ransom? Did the Lord Jesus stand as our representative? Are we healed by his stripes? It will be a terrible thing indeed if we should come short of a portion in his sacrifice; it were better for us that we had never been born. Solemn as the question is, it is a joyful circumstance that it is one which may be answered clearly and without mistake. To all who believe on him the Lord Jesus is a present Saviour, and upon them all the blood of reconciliation has been sprinkled. Let all who trust in the merit of Messiah's death be joyful at every remembrance of him, and let their holy gratitude lead them to the fullest consecration to his ca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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