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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소개 1 - 김헌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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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소개 (I)

김헌수  (대전 성은교회 목사)

성약출판사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출간한다. “역사적인 개혁 신앙과 그 신학을 오늘날 이어받고 전파하며 전수하는 일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 위하여 서적을 출판”하는 것을 사시(社是)로 삼고 있는 성약출판사가 독립개신교회에서 번역한 ꡔ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ꡕ을 출간하는 것은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개혁 신앙고백서들을 출간하는 것은 개혁 신앙에 입각한 강설집의 출판과 좋은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출간을 계기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작성과 번역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시의적절한 일일 것이다.


 

1.『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6세기에 독일의 팔쯔(Pfalz) 영방(領邦)에서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작성된 신앙고백서이며, 이 요리문답의 이름도 팔쯔의 수도 하이델베르크에서 나왔다.


하이델베르크는 라인 강의 지류인 네카르 강변에 자리하고 있고, 그림과 같은 고성(古城)과 1386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대학으로 유명하다. 인구 14만의 도시에 학생이 약 2만 명이고, 연 4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 그들은 괴테와 칸트, 헤겔과 하이데거가 산책했다고 하는 ‘철학자의 길’을 걷기도 하고, 전쟁으로 반쯤 파괴된 고성에 올라 여러 건축 양식이 혼합된 성의 건축미를 감상하기도 하며, 전망대에서 현대식 시가지와 네카르 강, 그리고 그 건너편의 라인 평원을 보기도 한다. 그들의 마음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전쟁과 평화의 주제가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하이델베르크의 진면목은 눈에 보이는 거기에만 있지 않다. 우리는 그곳에서 작성된 신앙고백에 주목한다. 물론 하이델베르크에는 우리의 요리문답과 관련된 사적(史蹟)들도 있다. 알프스 산맥의 이북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풍의 건물이라는 오토 하인리히 궁은 하이델베르크 종교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오토 하인리히가 지은 것이고, 그 옆에 있는 프리드리히 궁은 ꡔ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ꡕ의 서문을 쓴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이 지은 것인데, 그는 아버지가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증언할 때 함께 따라갔던 신실한 신자였다. 도시의 중앙에 있는 ‘성신 교회’는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린 곳이고 또한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가 주일 오후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설교했던 곳이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신학부도 두 사람이 교수로 봉직하며 가르쳤던 곳이다. 많은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만, 하이델베르크에는 종교개혁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흔적을 생생하게 붙잡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실을 꼼꼼히 살펴야 할 것이다. 


1)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1)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은 루터의 종교개혁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를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던 루터는 1518년 4월에 하이델베르크의 어거스틴 수도원에 와서 “하이델베르크 명제”를 발표했다. 그는 이 명제에서 사람의 선행과 이성, 혹은 교회의 조직과 부를 의지하는 것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대신 ‘십자가의 신학’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루터가 활동하던 동안 하이델베르크는 여전히 로마 교회의 영향 아래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에야 비로소 종교개혁의 영향 아래 들어왔다. 팔쯔의 새로운 통치자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544-1555)는 1545년 성탄절에 하이델베르크 성의 채플에서 미사 대신 개신교 방식으로 성찬을 시행했고, 다음해 1월 3일에는 하이델베르크의 시가지에 있는 ‘성신 교회’에서 성찬을 거행했다. 성찬을 개혁하면서 하이델베르크는 공식적으로 종교개혁에 가담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지속적인 종교개혁을 위해서 팔쯔 출신의 개혁자로 루터의 동역자이자 후계자인 멜란히톤(Melanchton)을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초빙했다(1546년). 그러나 그는 비텐베르크에서의 사역 때문에 거절했다. 게다가 1548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제국에 미사를 강요했고 하이델베르크에도 미사가 재도입되었다. 종교개혁은 물 건너 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개혁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고, 카를 5세는 1555년에 쉬말칼텐 동맹에 속한 신교도 제후들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를 맺어 제국 안에서 루터교를 인정했다. 그리하여 하이델베르크에서도 다시 미사 대신 성경의 교훈에 따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뒤를 이어 오토 하인리히(Otto Heinrich, 1556-59)가 팔쯔의 선제후가 되었다. 1529년부터 루터교를 받아들이고 쉬말칼텐 동맹에 속하여 활동했던 그는 교회의 개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선제후가 된 그는 목사 세 명을 감독관으로 파견하여 7주 동안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상황을 파악하게 했다. 그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청소년에 대한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고 성찬이 바르게 시행되지 않으며 백성들의 도덕적인 수준도 매우 낮았다. 그는 도덕적인 문제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뷔르템베르크 요리문답을 사용하도록 했다. 뷔르템베르크 요리문답은 26문답으로 구성되었고 그 내용도 주로 성찬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말씀에 대한 무지를 효과적으로 씻어낼 수 없었다. ꡔ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ꡕ과 같은 좀 더 포괄적인 요리문답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하인리히는 목사의 교육을 위해서 ‘지혜의 대학’(collegium sapientiae)을 세우려 했고, 이 일을 비롯한 다른 문제의 자문을 구하기 위해 멜란히톤을 초청했다(1557년). 멜란히톤은 그가 아끼는 제자 우르시누스와 함께 하이델베르크를 찾았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출신일 뿐 아니라 자문과 방문으로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을 도왔기 때문에 ‘하이델베르크의 개혁자’로 불린다. 선제후는 멜란히톤의 충고를 받아들여 대학을 개편하고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교수로 청빙했다. 멜란히톤의 가르침을 따르는 스톨(Heinlich Stoll)과 딜러(Michael Diller)뿐 아니라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의 후계자로 일했던 보퀴누스(Petrus Boquinus, 혹은 Bocquin)를 청했고, 또한 멜란히톤의 추천으로 헤슈시우스(Tilemann Heshusius, 혹은 Hesshus)를 신학 교수로 임명했다. 헤슈시우스는 엄격한 루터주의자였고, 성찬에 대한 논쟁에서 그의 성격상의 부족도 그대로 드러났다. 이 논쟁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의 또 다른 계기도 된다. 


2)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세 사람이 있다. 그들은 모두 하이델베르크 출신이 아니고 ‘하이델베르크에 온 사람들’이다. 그들을 영어 첫 글자로 재미있게 요약하자면 3P라고 할 수 있다. 3P, 곧 군주(Prince)와 설교자(Preacher)와 교수(Professor)가 하이델베르크에 왔다.2)


‘군주’로 지칭된 첫 번째 사람은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1559-76)이다. 그는 상속자 없이 세상을 떠난 오토 하인리히의 뒤를 이어서 1559년 2월에 팔쯔의 선제후가 되었다. 열 명의 동생 가운데 남동생 둘은 신부가 되고 누이 다섯은 수녀가 될 정도로 그의 집안은 철저히 로마 교회적이었다. 그도 로마 교회적인 분위기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이때 로마 교회의 부패도 가까이에서 목도하였고 나름의 판단을 내렸다. 그는 개신교 집안이었던 브란덴부르크 제후의 딸 마리아와 혼인하면서 종교개혁의 전통에 접촉했고, 스스로 성경과 루터의 글을 읽으면서 개신교로 전향했다. 그 이유로 그는 아버지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경제적으로 어렵게 생활했다. 그 기간을 믿음으로 인내했던 그는 아버지의 사후에 그 뒤를 이어 지머른(Simmern) 성주(城主)가 되었고, 3년 후에는 삼촌의 뒤를 이어 팔쯔의 선제후가 되었다. 선제후(選帝侯)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일곱 제후로 귀족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였고 팔쯔는 독일에서 가장 큰 선제후령(選帝侯領)이었으므로 프리드리히 3세는 가난한 귀족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된 셈이었다.


그렇지만, ‘경건 제후’라는 별칭을 가진 그는 자신의 부귀와 영화 대신 오토 하인리히의 뒤를 이어서 종교개혁을 진행시키는 데 마음을 썼다. 그가 당면한 첫째 문제는 성찬을 둘러싼, 엄격한 루터파와 온건한 루터파 사이의 대립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헤슈시우스는 엄격한 루터파일 뿐 아니라 성격상의 결핍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찬의 문제를 놓고, 집사였다가 목사로 임직된 클레비쯔(Klebitz)와 예배당 안에서 심한 논쟁과 다툼을 벌였다. 프리드리히는 두 사람이 성찬 집례 도중에 다툼을 벌인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을 해임하고, 멜란히톤에게 이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멜란히톤은 복잡한 논쟁 대신에 성경적인 단순함을 권고하는 대답을 보냈고, 그는 성찬에 대해서는 멜란히톤의 입장으로 정리했다. 성찬에 대한 멜란히톤의 견해는 칼빈의 이해와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도 반영되어 있다.


새로운 선제후 프리드리히도 전임자 오토 하인리히처럼 교회의 형편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와 성찬에 대한 낮은 이해, 그리고 도덕적인 해이 등이 동일한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이처럼 성찬에 대한 신학자들 사이의 불일치뿐 아니라 말씀에 대한 교중의 무지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작성의 계기가 되었다. 교인들의 무지에 대한 프리드리히의 깊은 관심은 뒤에서 살펴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서문”에 잘 표현되어 있다.



‘설교자’로 표현된 두 번째 인물은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 1536-1587)이다. 그는 14살 되던 해부터 7년 동안 프랑스 여러 대학에서 고전어와 법학을 공부하면서 위그노와 접촉했고, 개혁 교인으로 전향했다. 그는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다음에 제네바와 취리히에 가서 칼빈과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불링거(H. Bullinger)의 지도 아래 신학을 연구했다. 신학 수업 후에 그는 칼빈과 파렐(W. Farel)의 권유로 고향 트레베스(Treves, 혹은 Trier)에 돌아가서 라틴어 선생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점차 그의 복음적인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따르기 시작했는데, 그곳의 선제후이자 로마 교회의 대주교 요한은 그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그는 기병을 모집하여 성을 공격하고 올레비아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리드리히 3세가 보석금을 내고 그를 석방시켰다. 이것은 올레비아누스가 프랑스에서 공부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과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고 또한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을 위해서는 올레비아누스가 적임자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그를 개혁의 동지로 여겨 하이델베르크의 대학의 교수로 초청했다. 뛰어난 설교자였던 올레비아누스는 궁정 목사로 자리를 옮겼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하는 위원회에서 일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발표된 직후, 『팔쯔의 교회법』을 작성하는 일도 하였고, 『확실한 기초』라는 요리문답 해설서도 썼으며 그후 계속하여 언약 신학에 대한 책도 썼다.3) 


‘교수’로 언급된 세 번째 인물은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 1534-1583)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고향 브레슬라우(Breslau) 시의회의 후원으로 1550-57년까지 비텐베르크에서 멜란히톤의 지도 아래 공부했으며, 1557년에 멜란히톤과 동행하여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했다. 그후 그는 취리히를 방문하여 불링거와 교류했고, 제네바에서는 칼빈, 베자와 사귀었다. 그는 제네바 체류 기간 동안 성찬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받아들였고, 칼빈으로부터 그의 책들을 기념으로 받기도 했다. 멜란히톤의 지도 아래 온건한 루터교도로 시작한 우르시누스의 신학 수업이 개혁 신앙과 신학으로 마무리된 셈이다. 그는 1559년에 고향에서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으나 루터파 시의회에 의해 개혁파로 몰려서 1년 만에 그만두었다. 그는 취리히로 가서 베르미글리(Petrus Martyr Vermigli, 1500-1562) 밑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베르미글리의 추천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왔다. 이때 그는 칼빈, 라스코, 멜란히톤, 불링거 등을 참조하여 라틴어로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을 작성했다. 이렇게 준비가 된 그에게 새로운 일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새로운 요리문답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요리문답이 출간된 다음에는 요리문답의 주석서를 쓰면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4) 


3) 팔쯔 교회의 신앙고백으로서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의 계기는, 첫째, 성찬에 대한 이해로 교회가 내적으로 분열된 것과 둘째, 성경에 대한 교인들의 무지와 낮은 도덕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프리드리히 3세는 신학교 교수단과 교회의 감독들과 직원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조직했다.


위원회에서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전통적으로는 우르시누스가 교리적으로 틀을 놓고 올레비아누스가 문장과 문체를 다듬었다고 하지만,5) 두 사람의 정확한 역할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또한 하이델베르크에는 두 명의 젊은 신학자 이외에도 다른 훌륭한 신학자들도 있었는데(Boquinus, Erastus 등), 그들 중에 누가 위원회에 속했는가도 확실하지 않다.


위원회가 1562년 12월에 요리문답을 완결하자 프리드리히 3세는 이것의 심의를 위한 특별 총회를 개최했고(1563년 1월 11-17일), 목사와 신학 교수와 감독관들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자 프리드리히 3세는 그들을 불러서 그들의 결정에 대해서 재차 확인하고 1월 19일에 서문을 써서 출판사에 넘겼다. 그 서문에서는 저자에 대해서 “이곳의 신학부 교수회와 모든 감독관들 그리고 고명(高明)한 목사님들의 충고와 도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교훈의 요약 혹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요리문답을 작성했다”고 밝힌다. 우리는 두 사람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서 인정하면서도 위원회 공동의 작업으로 발표된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팔쯔 총회의 결정으로 확정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표지는 “선제후령 팔쯔의 교회와 모든 학교에서 가르치는 요리문답 혹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그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고백하는 일이었다. 엄격하게 말하면, 요리문답(catechism)은 묻고 답하는 ‘교육 방식’에 대한 말이고, 묻고 답하는 내용은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단순히 청소년 교육용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이해해야 하고, 저작권의 문제도 교회의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서문


프리드리히 3세가 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서문에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요약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볼 필요가 있다.6) 


하나님의 은혜로 라인 강변의 팔쯔 백작, 신성로마제국 선제후, 바이에른 공작 등의 지위에 오른 프리드리히는 짐(朕)의 선제후령과 라인 강변의 팔쯔 백작령에 사는 감독관, 목사, 설교자, 교회와 학교의 직원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며, 이에 다음의 사실을 알리노라.


하나님의 말씀이 깨우치는 것에 따라서……짐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직분과 지위와 통치권을, 단지 신민(臣民)들의 평화롭고 안정된 상태, 그리고 도덕적이고 성실하고 정결한 기풍과 행실을 세우고 확립하는 데에만 사용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의 말씀을 모든 도덕과 순종의 유일한 기초로 정당하게 깨닫고 경외함에 더욱더 이르도록 가르치고 이끄는 데에 부단히 사용할 의무를 느끼노라. 그들이 영원한 복과 현세적인 복에 들어가기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한마음으로 힘쓰며, 짐의 힘이 미치는 한에는 돕기를 원하노라.


……짐은 방년(芳年)의 젊은이들이 짐의 선제후령의 학교와 교회에서 모두 기독교적 교훈에 대해서 도무지 관심이 없고,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영속적이고 확실하고 일치된 요리문답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선생들은 자기의 계획이나 생각에 따라서 지도하고 가르치는 중대한 결핍이 있음을 보노라. 따라서 갖가지 큰 악들이 나오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함과 말씀을 아는 데에서 장성함이 없고 통일된 교육을 받지 못하며, 잡다하고 불필요한 질문들과 가끔은 (성경에) 적대적인 교훈으로 (학생들이) 짐 지워진 것을 목도하노라.


……짐은 젊은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무엇보다도 거룩한 복음의 순수하고 통일된 교리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 가운데서 교육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노라.


따라서 짐은 이에 상응하는 주의를 기울여, 그릇된 것과 균일하지 못한 것을 철폐하고 긴요한 개혁을 꾀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짐의 정부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하노라.


따라서 이곳의 신학부 교수회와 모든 감독관들 그리고 고명(高明)한 목사님들의 충고와 도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교훈의 요약 혹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요리문답을 독일어와 라틴어로 작성하여 출판에 부치노라. 앞으로는 교회와 학교에서 젊은이들이 이러한 교리로 경건하고 통일되게 교육받기를 원하며, 설교자와 교사 자신들도 젊은이들을 가르칠 때 확실하고 항구적인 문답서와 수단을 사용할 것이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매일 새롭게 시도하거나 (성경에) 적대적인 교훈을 도입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제 그대들 모두와 각자에게 온유하고 간곡하게 권하고 명하노니, 그대들이 하나님과 신민(臣民)의 영예를 위해 또한 그대들의 영혼의 필요와 복을 위해 요리문답 혹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관심을 갖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노라. 학교와 교회에서도 젊은이들이 바른 깨달음에 이르도록 가르치며, 강단(講壇)에서도 평민들에게 부지런하고 온전히 교훈하며, 이것에 따라 가르치고 행하고 살기를 원하노라. 이로써 젊은이들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지하게 가르침을 받고 훈육을 받으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삶의 개혁을 허락하시고 현세적인 복과 영원한 복을 내려 주시고 허락하시리로다.……이 모든 것이 마침내 그대들에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노라.

주후 1563년 1월 19일 화요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서문에 프리드리히의 경건함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이해했을 뿐 아니라 그 권력을 신민(臣民)의 물질적인 안녕과 복지보다도 영적인 안녕과 복을 추구하는 데 사용하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의 도덕적인 수준이 낮은 것을 우려하면서 그 원인을 다른 데서 찾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데서 찾았다. 도덕적 타락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그는 더 깊은 데에 문제가 있다고 파악했던 것이다. 그는 특히 선생들이 성경의 교훈을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가르치는 것이 근본적인 결핍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그는 그 해결책으로 요리문답을 작성했고, 이 요리문답에 따라서 가르칠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공적이고 사적인 도덕의 개혁을 허락하시고 현세적인 복과 영원한 복을 허락하실 것”을 소망했다. 특히 젊은이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때 하나님의 복 주심에 의해서 사회도 밝아질 것으로 이해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올레비아누스에게 제네바의 본을 따라서 『팔쯔의 교회법』도 작성하도록 했고, 11월 15일에 그것을 간행할 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52주로 구분하여 함께 출판함으로써 교회와 학교에서 매 주일 요리문답을 가르치도록 했다.



5)『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출판과 상반된 반응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기대 이상의 반향을 일으켰다. 일 년 사이에 3판이 간행되었고, 같은 해에 라틴어와 화란어로 번역되었다. 라틴어로 번역된 요리문답은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사용되었으며, 또한 화란어(1563), 프랑스어(1570), 영어(1572), 그리스어(1597), 헝가리어, 포르투갈어 등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평민들에게도 가르쳐졌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대한 환영이 강했던 만큼 반대도 심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다른 선제후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고 1566년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폐기하지 않으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 밖에 놓일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다. 1555년에 작성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로마 교회와 루터 교회를 인정하고 칼빈의 가르침은 인정하지 않았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사용하면 칼빈의 교훈을 전파하는 것이므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정신을 어기는 것이며, 또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밖에 놓인다는 것은 선제후의 직위를 빼앗긴다는 뜻이었다. 황제의 경고에 대해서 프리드리히 3세는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함을 이야기하고 자신은 칼빈의 저작을 읽은 적이 없으며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따랐음을 밝혔다. 요리문답이 칼빈의 영향을 받았다는 비난에 대해서 그는 “나의 요리문답은 자구(字句)가 성경에서 나왔고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았음을 요리문답의 여백에 기록된 성구가 보여 줍니다” 하고 진술했다. 그는 누구든지 성경으로 그에게 설명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듣겠다고 하면서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에만 소망을 둔다는 요지로 발언했다. 그의 확신에 찬 발언으로 대적들은 잠잠해졌고, 그 자리에서 “당신은 우리 모두보다 더 경건하다”는 지지를 얻기도 했다. 


이러한 반대도 있었지만, 격려도 있었다. 불링거는 올레비아누스가 보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받고 4월에 즉시 답장을 보내면서 “이 책의 구성은 분명하며 순수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내용은 모두 쉽게 이해되며 경건하고, 또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교리들을 풍성히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출간된 요리문답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찬송 받으시기를 원하며, 이 문서에 그의 복으로 관(冠)을 씌워 주시기를 바라나이다”라고 썼다.


칼빈 역시 1563년 7월 23일에 발행한 『예레미야 주석』을 프리드리히 3세에게 헌정(獻呈)했다. 헌정사에서 칼빈은 특히 성찬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프리드리히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성찬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을 상론(詳論)하고, 참된 신앙 때문에 프랑스나 네덜란드에서 쫓겨난 망명자들을 받아 준 데 대해서 감사를 표현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전하의 대학을 빛내는 학자들 중에는 그들의 뛰어난 명성으로 널리 알려진 외국인들이 몇 명 있는데, 그들의 이름을 열거할 필요는 없겠습니다”고 덧붙였는데,7) 우리도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6)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들


우리가 하이델베르크를 친밀하게 생각하는 것은 고색창연한 고성(古城) 때문도 아니고 독일 최고(最古)의 대학 때문도 아니며 괴테나 칸트와 같은 사람 때문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부름에 따라 각기 고향을 등지고 하이델베르크에 온 그 나그네들 때문이다. 그들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이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다(고후 6:9-10).


그들뿐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을 따른 무명의 성도들도 역시 유명한 자이고 산 자이고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핍박 가운데서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유일한 위로’가 삼위 하나님 안에 있음을 고백하였다(요리문답 1문).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한 그 나그네들 때문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道)”를 받은 우리도 동일한 고백을 하면서 동일한 길을 걷는다(유 3). “역사적인 개혁 신앙과 그 신학을 오늘날 이어받고 전파하며 전수하는 일”은 남이 알아주지 않는 무명한 일이지만, 사실은 유명한 자가 하는 일이고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일인 것이다. (계속)


 

1).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과 요리문답의 작성에 대한 역사를 위해서는, 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I (Baker Book House, 1983), 523-535; J. W. N., "Introduction: Ursinus," in The Commentary of Dr.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Eerdmans, 1954), vii-xxiii; J. Visscher, I Belong: A Course of Stud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Premier, 1988), pp. 129-140; H. Hanko, "Ursinus and Olevianus," in his Portraits of Faithful Saints; 또한 Biographisch-Bibliographisches Kirchenlexikon (Traugott Bautz, 1990, 93, 97); Die 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 3판 (J.C.B. Mohr, 1959); Cyclopaedia of Biblical,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Literature (Harper & Brother, 1877) 등의 사전에서 관련 항목을 참조했다

2). 3P에 대한 아이디어는 Arthur van Delen, Only By Faith, I (Pro Ecclesia, 1998), pp. 5-7에서 얻었다. 세 사람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로는 Thea B. van Halsema, Three Men Came to Heidelberg (Baker Book House, 1992)가 유익하다. 

3) 영어 번역으로는, A Firm Foundation: An Aid to Interpreting the Heidelberg Catechism, translated and edited by L. Birma (Baker, 1995).

4) 원저는 라틴어로 되어 있는데, 축약된 영어 번역으로는, The Commentary of Dr.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translated by G. Williard (Eerdmans, 1954).


5)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우르시누스의 『소요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유사성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9문 가운데서 91개가 108문으로 구성된 우르시누스의 『소요리문답』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유사성을 넘어서서 더 이상 확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저작권에 대한 다양한 추측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J. Visscher, I Belong, The Teacher"s Lesson Book (Premier, 1988), pp. 137-138; L. Birma, "General Introduction," in A Firm Foundation: An Aid to Interpreting the Heidelberg Catechism (Baker, 1995), xxv-xxviii.


6) J.N. Bakhuizen van den Brink, De Nederlandse Belijdenisgeschiriften (Uitgeverij Ton Bolland, 1976), pp. 150-51. 일부 영어 번역은, T. B. van Halsema, Three Men Came to Heidelberg (Baker, 1991), pp. 50-51.


7) J. Calvin, Commentaries on the Book of the Prophet Jeremiah and the Lamentation, I (Eerdmans, 1950), xvi-xxiv. 헌정사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로 마친다. “비록 졸인(卒人)의 찬사나 본서의 헌정이 전하의 위대한 성품에 조금도 덧보탤 것이 없겠지만 스스로의 의무라고 생각한 것을 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고명한 제후여 안녕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신령한 지혜를 더욱 넘치게 주옵시고, 오래토록 안전하게 보호하시며, 전하의 영예로운 자리가 전하와 전하의 후손들에게 길이 융성하게 이어지게 하여 주시기를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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