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1일 “가짜 화형식”
오늘은 벨직신앙고백서의 작성자 귀도 드 브레(Guido de Bres[Guido de Bray, Guy de Bray], 1522–1567)의 허수아비 화형식이 있었던 날입니다. 1562년 1월 21일, 도르닉의 시장터에서는 왕명에 의해서 화형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드 브레는 프랑스로 도주했기 때문에 허수아비만 불태워졌지만, 1565년에는 붙잡혔고 1567년에는 교수형(絞首刑)을 당했습니다. 드 브레는 스테인드글라스 화가의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종교개혁 사상을 접했고, 25세 전에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장 드 브레의 막내아들은 이단자가 되었고 만약 새로 얻은 신앙이 발각되기라도 하면 화형을 당하게 될 처지였다. 1548년 귀도는 집을 떠나기로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그는 소년 왕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한 영국으로 갔다. 10살의 에드워드는 칼빈이 발전시킨 개혁 신앙을 받아들인 고문관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그런 영국은 신교도 피신자들을 환영했다. 그 피신자들 가운데 영국에 첫 번째 프랑스어 교회를 세운 두 명의 벨기에 사람이 있었다.[Thea B. Van Halsema, Three Men Came to Heidelberg and Glorious Heretic: The Story of Guido de Bres, 강변교회 청소년학교 도서위원회 역,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 (서울: 성약, 2006), 128.]
귀도는 영국에 피신한 15,000여 명의 개신교도들과 함께 지내면서 공부한 후, 귀국하여 순회설교자로 일했습니다. 그는 칼빈의 설교를 듣고, 베자에게서 배우며 한층 성장해갔습니다. 마침내 귀도는 1561년에 “벨직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를 작성했습니다. 네덜란드신앙고백서 혹은 벨기에신앙고백서라고 불리는 이 문서는 도르트 총회(1618-1619)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도르트 신조와 함께 일치신조로 채택되었습니다. 귀도는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변호하기 위해 신앙고백서를 집필했습니다. 벨직신앙고백서의 표지에는 “저지대에 사는 성도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순전함을 따라 살기 위하여 일치된 의견으로 만든 신앙고백서”라는 문구와 함께 베드로전서 3장 15절이 적혀 있습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신앙고백을 위해 생명을 걸었던 귀도 드 브레. 불과 450여 년 전 일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신앙고백서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서는 나로 하여금 성경으로 돌아가게 해 주었습니다. 신앙고백 위에서 전보다 더 열렬히 성경을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이 문서를 보존하며, 가르칠 것입니다.
제5조 성경의 권위에 관하여. 우리는 이 모든 책들을, 그리고 이 책들만을 우리의 신앙의 법칙과 토대와 확인을 위한 거룩한 경전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를 믿는 것은 교회가 이 책들을 정경으로 받아 동의하기 때문만이 아니고, 더 특별하게 이 책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자증(自證)하는 것을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증언하시기 때문이다. 아주 눈먼 사람도 성경에서 예언된 것들이 성취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김영제 편저, 『기독교 신앙고백』 (수원: 영음사, 2011),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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