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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1월 21일,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톤(W. B. Scranton, 시난돈[施蘭敦])이 뉴욕을 떠나 한국으로 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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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 전도유망한 미래를 포기한 스크랜톤 선교사

 

오늘은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톤(W. B. Scranton, 시난돈[施蘭敦])가 뉴욕을 떠나 한국으로 출발한 날입니다. 1885년 1월 21일의 일입니다. 1856년 미국 코네티컷 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난 윌리엄 스크랜톤은 예일대학과 뉴욕의대를 졸업한 뒤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의사로 활동했습니다그러나 해외선교사업에 관심이 있었던 스크랜톤은 1884년 미감리회의 한국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1885년 2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같은 감리교 선교사였던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내외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합니다. 1885년 5월 3일 스크랜톤 가족들은 서울에 도착한 즉시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H. N. Allen)이 경영하는 제중원(濟衆院)에서 의료선교를 돕습니다제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료 기관이었습니다. 1885년 9월 윌리엄 스크랜톤은 정동에 시병원(施病院)을 개원하여 의료선교에 착수하였고, 1887년에는 동대문에 부인 전문병원인 보구여관을 설치하는 한편 시병원을 구리개(상동)로 옮겨 상동병원이라 하였습니다이 보구여관은 명성황후가 하사한 이름으로서 현재 이화여대 병원의 전신입니다또 1892년부터는 상동병원 내에 상동교회를 설립하여 담임목사로서 활동합니다스크랜톤은 초기 미감리회 선교부의 회계를 거쳐 서울·경기 일원의 감리사로 있으면서미감리회 한국선교 전체를 지휘하였습니다그는 1907년 6월까지 22년 동안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한 후, 1922년 3월 일본 고베(神戶)에서 소천하였습니다그의 어머니 스크랜톤 부인 역시 1886년 5월 30일에 정동에 여학당을 설립하였고명성황후는 1887년에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어떠한 혈연적 관계도 없는 조선 땅에 온 두 모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꺼이 고생을 감수했습니다우리는 그들의 눈물과 땀기도 위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당신은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권리를 포기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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