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 “25만평, 100달러”
오늘은 윌리엄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 한국이름: 인돈)선교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1891년 2월 8일, 인돈은 미국 조지아 주 토머스빌(Thomasville)에서 출생했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인돈은 두 살 때, 첫째 누나를, 네 살 때 큰형을 잃었고, 열 살 때에는 부모님의 별거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교회학교 선생님 신시어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908년에 어머니를 여읜 인돈은 졸업을 앞두고 한국선교사 변요한(邊約翰, Preston)의 강연을 듣게 됩니다. 인돈은 큰 감동과 도전을 받고 한국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조지아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당시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는 GE(General Electrics) 입사를 거부하고 선교 사역에 헌신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딘 때가 1912년,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그것이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린튼 가의 길고 긴 출발의 시작이었으니, 그분이 바로 나의 할아버지다……처음 선교 사역지로 부임한 곳은 목포였다……당시의 사진들을 보면 목포는 도시라기보다는 작은 촌락이었다. 린튼은 곧 군산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했다. 영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17년 영명학교의 교장이 되었다.[인요한,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서울: 생각의나무, 2010), 42-43.]
인돈은 대학 졸업 전에 남장로교선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국에 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애틀랜타에 있던 땅을 처분하였습니다. 인돈은 약 25만평의 땅을 100달러에 팔았습니다. 그는 부해지고자 하는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는 만추리아 증기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69세에 세상을 떠난 인돈은 48년 동안 한국을 위해 일했습니다. 전주신흥고교와 기전여고의 교장을 역임했고, 한남대학교(당시 대전대학)를 설립하여 초대총장으로 섬겼습니다. 인돈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한국전쟁 때에도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첫 안식년 기간 중 인돈은 삼일운동에 대한 목격담을 미국남장로교 평신도대회에서 보고했습니다. 그의 손자는 지금도 우리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으니 도전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 일생입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하여 내 것을 버리고 있습니까?
국제평화회의는 1,500만 한국민의 일본에 대한 항의를 인정해야 합니다. 일본은 10년 동안 조직적인 방법으로 5000년 동안 꾸준히 존재해온 한국인의 인종적 정체성과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일본 정부가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기 전까지 행진을 질서정연하였고, 폭력도 없었으며, 반항도 없었습니다. 일본 당국이 항거를 진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리에 나온 사람들을 체포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럴 줄 알고 하는 행진이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감옥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군중으로 넘쳤습니다. 평화 행진은 전국 각지에 퍼졌습니다. 감옥에 빈자리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기병대를 보내서 말발굽으로 짓밟았습니다. 그래도 행진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더욱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평화행진을 하는 수천 명의 시위대원들을 총으로 쏘고 총검으로 찔렀습니다.[오승재, 『지지 않은 태양 인돈』 (인천: 도서출판 바울, 2012), 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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