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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 “성찬은 은혜의 수단인가, 회심 의식인가”
오늘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가 별세한 날입니다. 1729년 2월 11일, 노샘프턴의 회중교회 목사 스토다드는 86년의 인생길을 마쳤습니다. 그는 하버드에서 공부했고, 1670년부터 60년간 목회하였습니다. 그의 지도 가운데 1679년, 1683년, 1692년, 1712년, 1718년에 “수확들(Harvests)”이라고 불리는 각성과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스토다드는 “코네티컷 강 골짜기의 교황(Pope of the Connecticut River Valley)”으로 불릴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원고 없이 강단에 섰던 인상적인 외모의 설교자는 1677년에 성찬을 집례하던 중 그리스도의 임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찬 중 은혜를 체험한 스토다드는 공개적으로 죄악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 모두에게 성찬을 개방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인크리스 매더, 코튼 매더는 스토다드주의(Stoddardism)로 일컬어지는 성례론에 반대했습니다.
스토더드는 노샘프턴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선임자가 강력하게 반대했던 중도언약(Half-Way Covenant)을 받아들였다. 목회적으로, 그는 첫 이주민들의 많은 자녀들이 영적인 강도에 있어서 약해진 것을 보았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은혜에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 조금 알든지 아니면 전혀 확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교회의 정회원권을 부여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했고, 그들의 마음속에서 구원에 대한 어떤 소망의 근거라도 발견한 자들은 교회로 나오라고 강권했다.[Joel R. Beeke and Randall J. Pederson, Meet the Puritans: With A Guide to Modern Reprints, 이상웅‧이한상 역, 『청교도를 만나다』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181.]
스토다드의 교회론은 당시 많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이러한 포용적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스토다드의 관용적 성찬 방식을 수용합니다.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교리를 타협한다면 당장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고 오는 세대의 영적건강을 생각하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은혜의 수단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9)
1700년에 이르러 성례 논쟁은……누가 성찬에 참예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였으며, 이 새로운 논쟁의 중심에는……솔로몬 스토다드가 서 있었다. 이 노샘프턴의 교구 목사는 뉴잉글랜드가 오직 분명한 회심의 증거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성찬에 참예할 수 있는 권한 혹은 완전한 세례교인이 될 자격을 부여하는 위험한 교리를 수용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확고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그의 삶이 악한 것들에서 떠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성찬을 허락하자는 교리를 받아들였다. 스토다드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누가 회심했는지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가시적인 교회는 어쨌든 완전한 신자들만의 모임이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둘째, 성찬은 은혜의 방편이므로 신실하게 바로 서 있는 사람들에게 성찬을 허락하면 그들이 회심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결국 논쟁에서 승리한 스토다드는 성례가 그 자체로서 ‘회심 의식(a Converting Ordinance)’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George M. Marsden,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역,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6), 61.]
오늘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가 별세한 날입니다. 1729년 2월 11일, 노샘프턴의 회중교회 목사 스토다드는 86년의 인생길을 마쳤습니다. 그는 하버드에서 공부했고, 1670년부터 60년간 목회하였습니다. 그의 지도 가운데 1679년, 1683년, 1692년, 1712년, 1718년에 “수확들(Harvests)”이라고 불리는 각성과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스토다드는 “코네티컷 강 골짜기의 교황(Pope of the Connecticut River Valley)”으로 불릴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원고 없이 강단에 섰던 인상적인 외모의 설교자는 1677년에 성찬을 집례하던 중 그리스도의 임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찬 중 은혜를 체험한 스토다드는 공개적으로 죄악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 모두에게 성찬을 개방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인크리스 매더, 코튼 매더는 스토다드주의(Stoddardism)로 일컬어지는 성례론에 반대했습니다.
스토더드는 노샘프턴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선임자가 강력하게 반대했던 중도언약(Half-Way Covenant)을 받아들였다. 목회적으로, 그는 첫 이주민들의 많은 자녀들이 영적인 강도에 있어서 약해진 것을 보았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은혜에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 조금 알든지 아니면 전혀 확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교회의 정회원권을 부여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했고, 그들의 마음속에서 구원에 대한 어떤 소망의 근거라도 발견한 자들은 교회로 나오라고 강권했다.[Joel R. Beeke and Randall J. Pederson, Meet the Puritans: With A Guide to Modern Reprints, 이상웅‧이한상 역, 『청교도를 만나다』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181.]
스토다드의 교회론은 당시 많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이러한 포용적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스토다드의 관용적 성찬 방식을 수용합니다.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교리를 타협한다면 당장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고 오는 세대의 영적건강을 생각하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은혜의 수단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9)
1700년에 이르러 성례 논쟁은……누가 성찬에 참예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였으며, 이 새로운 논쟁의 중심에는……솔로몬 스토다드가 서 있었다. 이 노샘프턴의 교구 목사는 뉴잉글랜드가 오직 분명한 회심의 증거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성찬에 참예할 수 있는 권한 혹은 완전한 세례교인이 될 자격을 부여하는 위험한 교리를 수용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확고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그의 삶이 악한 것들에서 떠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성찬을 허락하자는 교리를 받아들였다. 스토다드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누가 회심했는지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가시적인 교회는 어쨌든 완전한 신자들만의 모임이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둘째, 성찬은 은혜의 방편이므로 신실하게 바로 서 있는 사람들에게 성찬을 허락하면 그들이 회심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결국 논쟁에서 승리한 스토다드는 성례가 그 자체로서 ‘회심 의식(a Converting Ordinance)’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George M. Marsden,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역,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6),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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