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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누가복음 9장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모든 일에는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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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누가복음 9장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모든 일에는 사랑을”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9:50)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12제자가 아닌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미덥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축귀(逐鬼)사역할 자격이 있는가? 주님의 죽음이 임박해 있건만, 요한은 텃세를 부르는데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아직까지 그는 우레의 아들인 것입니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누가복음 9:49)

예수님께서는 열 두 사도를 반대치 않는 사람들은 열 두 사도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요한의 기득권 주장을 일축(一蹴)하십니다. 요한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을 봅니다. 자신도 모르게 교단과 학연에 매여 편 가르기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지연과 혈연, 학풍에 의식적으로 집착합니다. 그리고 내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과 사상과는 상대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예수님 편에서 일하는 자는 상호존중의 바탕 위에서 협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생명과 같은 교리와 아디아포라(adiaphora)를 구분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할 때 “거룩한 공회”를 언급합니다. 이는 보편적 교회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벨직신앙고백 27항은 보편적 공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가톨릭교회, 즉 보편적인 공교회를 믿고 고백한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고, 성령으로 성화되고 인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전적 구원을 바라는 참된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하나의 거룩한 회중이며 회합이다. 이 교회는 세계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세계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왕이시지만 신하된 백성 없이는 왕이실 수 없으므로 진리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교회가 때로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교회를 광분하는 온 세상에 맞서도록 보존하시고 지탱하신다. 아합의 위험한 통치 기간에도 그러셨으니, 그때 주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7천명을 보존하셨다. 더구나 이 거룩한 교회는 어떤 장소나 혹은 어떤 인물들에게 국한되거나 구속되어 있거나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에 퍼져 흩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믿음의 힘으로, 같은 한 성령 안에서 마음과 뜻으로 연결되고 연합되어 있다.[김영재 편저, 『기독교 신앙고백』 (수원: 영음사, 2011), 474-75.]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모든 일에는 사랑을”(unity in necessary things; liberty in doubtful things; charity in all things, In necessariis unitas, in dubiis libertas, in omnibus caritas)이라는 라틴 격언을 기억합시다. 프란시스 쉐이퍼는 신학적 자유주의에서 분리되어 나간 운동의 지도자들에게서 사랑의 결핍을 발견했습니다. 분리 운동 내에서 서로에 대한 증오가 난무한 현상은 현재 우리 교회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비본질적인 문제로 다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나와 다른 성도를 싸잡아 비난하지 맙시다. 예수께서 그를 위해서 피 흘리셨으니 마음을 열고 배웁시다.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23:8)라고 말씀하신 주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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