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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경건한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From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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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4일 “경건한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Fromme)”

오늘은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ederick III)가 태어난 날입니다. 1515년 2월 14일에 출생한 그의 별명은 경건한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Fromme)입니다. 팔츠(Pfaltz)는 독일 남부의 선제후국으로서, 종교개혁 초기에는 로마 가톨릭을 고수했습니다. 선제후(選帝侯)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출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 제후를 말합니다. 선제후 7인의 지위과 권력은 국왕의 그것에 준하였습니다. 1559년에 선제후가 된 프리드리히 3세는 팔츠를 독일 칼빈주의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1563년에는 가장 영향력 있는 개혁파 신앙고백 가운데 하나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채택하여 출판했습니다. 이로 인해 팔츠는 독일에서 칼빈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보루(堡壘)가 되었습니다. 총 129개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성경, 『천로역정』,『그리스도를 본받아』다음으로 세상에 가장 널리 보급된 서적이 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가의 공주인 마리아를 알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갓 17세의 눈부신 아가씨였다. 마리아는 프리드리히에게 자기와 결혼하려면 매일 성경을 읽고 마르틴 루터의 글을 공부하겠다고 약속하라고 했다. 마리아와 결혼하기를 원했던 그는 이미 자신의 아버지와 황제가 속한 교회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터라 그러겠다고 약속했다……결혼식 후 그들은 트리에르 근처에 있는, 비르켄펠트의 외풍이 심한 낡은 성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일곱 명의 아이들을 기르며 20년을 살았다……프리드리히는 마리아에게 한 약속을 지키면서 자신을 괴롭히던 많은 질문들의 답을 찾았다. 성경은 그에게 믿음을 통해 자신의 죄가 용서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홀로 또는 가족과 함께 기도할 때 그는 주님께 직접 기도하기 시작했다.[Thea B. Van Halsema, Three Men Came to Heidelberg and Glorious Heretic: The Story of Guido de Bres, 강변교회 청소년학교 도서위원회 역,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 (서울: 성약, 2006), 16-17.]

그는 선제후가 되기 전 20년간 힘든 시기를 겪었습니다. 아내는 종종 친정의 친척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프리드리히의 아버지 요한이 아들의 종교개혁 신앙을 싫어하여 지원금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제후처럼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며 기다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애3:25).

1562년 신성로마제국 시대에 팔츠 지방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자신의 영토에서 사용되는 새로운 교리문답을 만들기 위해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명령했다. 이 새로운 교리문답은 다음 세 가지 목적을 충족시켜야 했다. 첫째, 이 교리문답은 청소년에게 신앙의 기본 진리에 대해 가르친다. 둘째, 설교자들의 안내 역할을 한다. 셋째, 종교개혁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팔츠 지방에서 이 교리문답은 모든 교회들을 하나 되게 하는 신앙고백의 형태를 지녀야 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신학적인 다양한 논쟁에서 벗어나 자신의 영토 안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하나 되게 하는 교리문답을 원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이 교리문답이 단순히 성경에만 기초해서 만들어지기를 바랐다. 이 목적을 위해 신학 교수들과 목회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었다. 프리드리히 3세 자신도 이 위원회에 참여했다. 이 위원회에서 교리문답의 초안이 작성되었다.[Kevin DeYoung, The Good News We Almost Forgot, 신지철 역, 『왜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사랑하는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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