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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9일 “백조의 노래”
오늘은 황제 벤젤에 의해 소집된 프라하의 특별 총회가 폐회된 날입니다. 1413년 2월 19일, 후스의 지지자들의 청원으로 열린 총회는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 회의에서 후스(Jan Hus)는 대리인을 통해 자신의 교회론을 주장했습니다. 후스는 로마가톨릭의 계층구조(hierarchy), 즉 교황, 추기경, 주교 등이 지배하는 구조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택함을 입은 무리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을 이룬다고 강조했습니다. 후스의 반대파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황제는 더 이상 후스파의 교회갱신 및 사회개혁 운동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후스는 교황 알렉산더 5세에 의해 파문당한 상태였고 황제는 교황의 면벌부(면죄부, Indulgence) 판매를 통해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강단에서 그는 진리에 순종하려는 삶 곧 성화를 강조하였다. 그의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위한 결단을 불러일으켰고, 그러나 시시때때로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는 청중들을 야단치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교회의 공적 언어가 라틴어였다. 그러나 후스는 일반 대중들이 사용하는 체코어로 설교하였다. 또한 그의 설교는 배우지 못한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내용과 짧은 문장으로 짜여졌다. 그는 체코어로 번역된 성경을 계속 수정해 나가면서 이 언어의 철자법을 개발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체코 사람들의 정서에 잘 맞는 찬송 가사를 지어서 대중적인 찬송을 보급하였다. 그래서 일반 대중들은 찬송으로 신앙의 진리를 고백하였다. 후스의 설교는 프라하대학의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주었고, 이 공감대는 설교를 듣는 일반 청중들에게도 확산되었다. 황제 벤젤 4세 또한 그의 설교를 경청하였다.[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6세기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의 유산』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32.]
1415년 7월, 후스는 처형 직전에 앞날을 예견하는 글을 썼습니다. 거위는 불에 타지만 백 년 후 백조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체코어로 후스(hus)는 거위(goose)를 뜻합니다. 백년 후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은 백조의 노래가 되어 지금까지 공명되고 있습니다. 좁은 길을 걷고 있지만, 포기하지 말고 불러야 할 노래가 있습니다. 피와 희생으로 인을 친 백조의 노래를 잘 익혀 가족과 친구들에게 가르쳐줍시다. 이 노래가 계속 울려 퍼지게 합시다.
그가 최후를 맞기 얼마 전에 보낸 서신들은 기독교 문학 가운데서도 최고봉에 속한다……“가장 거룩하신 그리스도시여, 저는 비록 약하오나 당신의 뒤를 좇도록 이끌어 주소서. 당신이 직접 이끌지 않으시면 우리들은 당신을 좇을 수 없나이다. 나의 영혼을 강건케 하셔서, 기꺼이 감당하도록 하소서. 만약 육신이 약하거든 당신의 은혜로 앞장을 세우소서. 은혜가 당신과 나 사이에, 그리고 제 뒤에 따르게 하소서. 당신이 아니시면 당신을 위하여 잔인한 죽음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나에게 두려움 없는 심장과 올바른 신앙과 요동치 않는 소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어서 당신을 위해 인내와 기쁨으로 저의 생명을 바치게 하시옵소서. 아멘.”[Bruce L. Shelly, Church History In Plain Language, 박희석 역, 『현대인을 위한 교회사』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297-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