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9일 누가복음 15장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누가복음 15:7)
여기 항상 심각하고 진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웃지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는 것은 좋은 일 아닙니까? 죄인이 회개가 일어나는 그 곳은 복된 자리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수군거리기며 예수님을 헐뜯습니다.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지요. 주님은 그들에게 3가지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는 모두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바 된 자, 즉 죄인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돌아올 때 기뻐하신다는 것이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양과 드라크마는 스스로 주인에게 돌아올 능력이 없습니다. 주인이 일어나 수고하여 찾아와야만 잃은바 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인은 스스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겨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야만 합니다.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에스겔 34:15-16)
하지만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는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탕자는 스스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제 발로 나간 둘째 아들을 아버지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의 돌이킴은 헛수고가 되고 맙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후반부는 탕자를 영접하는 아버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아들을 측은히 여겨 복권시켜 주었습니다. 문제는 맏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 사는 탕자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탕자의 귀환을 축하하는 아버지의 잔치를 못마땅해 하는 맏아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여, 하나님의 기쁨을 나의 즐거움으로 삼기 원합니다.
무릎이 좋지 않았지만 지팡이를 짚는 것도 잊어버리고는 거의 점프하다시피 뛰었다. 체면도 잊어버렸다……언젠가는 이 길을 이렇게 뛰어 내려가리라고 생각했었다……그는 아들의 눈을 오래오래 들여다보며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 나서 아들을 얼싸안고는 그가 예전에 잘 자라며 밤마다 키스해 주던 그의 얼굴을 부둥켜안았다. 지금은 더럽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엉키고 헝클어진 아들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밤마다 가슴을 찢던 고통을 숨기지 않고 토해내며 흐느껴 울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저를 노예로 삼아 주시겠습니까? 전 죄인이고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노인은 하인들을 불러 모으고는 말했다. “내게 반지와 최고의 예복과 가죽 신발을 가져 오거라. 그리고 불을 피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가장 성대한 축제를 준비하여라. 여길 보아라. 내 죽은 아들이 살아왔고, 이렇게 건강하지 않느냐. 한 때 내가 그를 잃었으나 이제 다시 찾았느니라.”[John Piper, The Prodigal’s Sister, 고진하 역, 『탕자의 여동생』 (서울: 생명의말씀사, 2010), 6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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