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1일 누가복음 17장 “실족(失足)과 용서(容恕)”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누가복음 17:4)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것(stumbling blocks)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주님은 작은 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소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실족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엄중하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주님은 실족과 용서가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누가복음 17:3)
예수께서는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스스로 조심해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일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내게 죄를 짓더라도 일곱 번 회개하였으면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닌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용서의 사람입니다. 그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의 과거는 보혈로 덮였으며, 현재와 미래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회개하는 죄인의 청원이 무시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 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 받은 우리가 백 데나리온 빚진 형제의 목을 붙들어 잡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 역시 꼭 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용서했기 때문에만 용서받았다고 가르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신중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가르침은 만일 내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범법자요, 악한 죄인임을 보아 온 사람들은 천국에서 그의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께서 그를 대가 없이 용서해 주심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것을 실례로 보고 알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을 거절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신의 용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 존전에서 깨어져 있을진대 나는 남을 용서하기를 거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도 않으면서 그리스도에게 자기 죄를 용서받았다고 속편하게 상상하는 사람들은 영원 세계에서 깨어날 때 주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정신 차리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론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용서를 받고 용서받은 것을 아는 사람은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D. Martyn Lloyd-Jones, Studies In the Sermon on the Mount, 문창수 역, 『산상설교집 (상)』 (계룡: 2007), 22-23.]
예수께서 특별히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을 명심합시다.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자, 즉 잘못을 회개하는 소자를 용서하지 않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잠자리에 누울 때, 성령께서 고요히 경고하신다면 수화기를 드십시오. 용서하지 않는 자는 평안히 누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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