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1일 “국왕이 내려준 교명(校名)” 오늘은 고종 황제가 아펜젤러가 세운 학교에 이름을 하사한 날입니다. 1887년 2월 21일, 고영필(高永弼)과 이겸라(李謙羅) 2명으로 시작한 학교는 이제 “배재학당”이라는 번듯한 교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1885년 4월에 우리나라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1886년 6월 중순까지 제대로 선교활동을 벌일 수 없었습니다. 1884년 매클레이 선교사는 김옥균을 통해 고종에게 선교 윤허(允許)를 청했습니다. 고종이 선교사들의 학교 및 병원 사업을 허락하여, 선교부는 꿈에 부풀었지만, 조정의 의도는 서구문명에의 접촉에 있었습니다. 1885년 8월,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는 두 칸짜리 방의 벽을 헐어 교실을 만들고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학교는 이렇게 볼품없이, 조용히 시작되었습니다.
아펜젤러가 세운 이 학교는 놀랍게 발전하여 1887년에는 정식으로 정부의 인가도 받았고 고종황제는 이 학교의 이름을 “인재를 양성하는 학당”이라는 의미에서 배재학당이라고 친히 지어 주고, 사액간판(賜額看板)까지 하사했다. 처음부터 이 학교는 기독교 이상을 분명히 하고 시작했다……많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배출하여, “겨레의 지식의 보고가 되었고, 민족정신의 중추가 되었으며 신문화의 선도자가 되었다.” 아펜젤러는 “감리교가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이 나라 720만의 사람들을 위한 최고 수준의 교양과 대학과정, 그리고 신학을 수업할 수 있는 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평소의 이상을 배재학당을 통해 구현하기를 원했다. 배재학당을 설립할 때부터 아펜젤러는 신학부를 설치하기를 원했으나 여건이 성숙치 않아 실행에 옮기지를 못했다.[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552.]
아펜젤러는 고종의 교명 하사에 힘을 얻어 복음사업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당시 학생은 60여명이었다고 합니다. 아펜젤러는 학생들에게 예수님의 말씀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 10:43) - 을 학생들에게 교훈으로 가르쳤습니다. 당시 정부와 학생들의 동기에 어떠했든 지간에,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복음을 전하는 사업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영혼구원을 위해 지혜가 더욱 요청되는 때입니다.
아펜젤러 부부는 선교를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헌 집 한 채를 매입해 작은 교실을 만들어 두세 명의 학생을 모아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1885년 11월 아펜젤러는 조선주재 미국대리공사 폴크(George Foulk)를 통해 고종으로부터 학교 설립허가를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1886년 2월엔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까지 하사받았다. ‘배재’란 당시에 흔히 쓰이던 ‘배양인재(培養人材)’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었다. 배재학당은 1886년 6월 정식학교로 개교했다. 처음에는 두 명이었지만 곧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몰려들어 가을에는 학생 수가 서른 명 가량으로 늘어났다. 아펜젤러의 관찰에 따르면 “한국인들 사이에는 영어를 배우려는 열정이 강합니다. 새로운 언어에 대한 부족한 지식이 출세의 걸림돌이 되어왔으며 지금도 그런 형편입니다. 한국인에게 ‘왜 영어를 배우려 하시오?’하고 물으면 거의 공통된 대답이 ‘벼슬을 얻기 위해서요.’라고 합니다.”[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2: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서울: 인물과사상사, 2007),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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