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2일 “곤궁 속의 영광”
오늘은 순교를 원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목회자 주남고(朱南皐, 후에 주남선으로 개명, 1888-1951)가 거창교회 제 5대 목사로 취임한 날입니다. 1931년 2월 22일, 주남고 목사의 위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10년 만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43세의 나이에 거창읍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으나 형편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일본의 쌀 착취로 인해서 생활은 더 곤궁해졌지만, 교인들에게 어려움을 알기기를 원치 않아 빈 솥에 뭍을 붓고 아궁이에 불을 땠다고 합니다. 주남고 목사는 1938년 12월에 위임목사 해제통보를 받았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해방 후 평양형무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인고(忍苦)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주남고는 이미 군자금 모금 운동으로 혹독한 옥고를 치른 적이 있었습니다.
조서가 다 꾸며지자 가족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은 채, 전원을 의성경찰서로 압송하였다. 의성경찰서에서의 고문은 더욱 혹독하였다. 손가락 사이에 나무토막을 넣고 누르고, 손등을 구둣발로 짓뭉갰다. 이 고문 이후, 주남고 전도사는 장지(長指)뼈가 부러져 휘청했고 출감 후에도 계속 글을 잘 못썼다 한다. 주남고 전도사의 글씨는 명필이었다. 허나 고문 후 장지가 휘어져 글씨가 엉망이 되었고, 설교 원고를 쓸 때마다 한참씩 장지를 만지곤 했다 한다. 또한 일경은 머리에도 심한 타격을 주었다. 의성경찰서에서의 고문은 다른 곳에서 받은 고문의 몇 갑절 더했다. 머리를 너무 많이 때렸기 때문에 정신이 얼얼하고 멍청하게 되었다. 그들이 머리를 혹독히 때린 이유는 정신 이상이 되라고 한 처사이다. 정신이상자가 되면 독립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 받은 고문으로 출옥 후에도 주남고 전도사는 종종 머리가 띵하게 아파온다고 말씀하시며 한참씩 눈을 감고 멍하니 앉아 있곤 하였다.[심군식, 『해와 같이 빛나리』 (서울: 교회교육연구원, 1990), 34-35.]
교회에서 성대한 위임식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주남고 목사님을 생각합니다. 위임식은 담임목회자가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교회가 지원을 결의하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출옥성도 주남고 목사의 시대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곤궁한 중에도 성도들을 배려했던 주목사님은 자신은 굶을지언정 방문한 부교역자들은 배불리 먹여 보냈다고 합니다. 이런 어른들이 그리운 시절입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태복음 23:11). 추억에 잠겨 비판에만 열을 올리지 않고, 작은 일부터 낮은 마음으로 섬겨야겠다는 다짐과 기도를 올립니다.
주목사님은 무명(無名)의 의지로 산 사람이다……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신 분이시기에 자기의 명예나 자신의 영예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기를 위해서는 사진 한 장, 글 한 편 남기기를 원치 않으신 분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그 약한 몸으로 그 숱한 고초를 겪으시고도 해방 후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될까하여 그는 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지요.” 혹은 “내 같은 죄인이 그런 귀한 체험을 하였지요.”라고 말씀하였는데, 그는 이처럼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는 일에 무관심했다.[이상규,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 (서울: 생명의양식, 2007),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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