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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에스더 3장 “하만과 다를 바 없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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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에스더 3장 “하만과 다를 바 없는 나”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아뢰되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지방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의 것과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에스더 3:8)

하만은 지금 화가 나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꿇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꿇어 엎드리지 않은 이유를 간단히 대답합니다. 자기는 유다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절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고관들에게 예의의 표시로 인사하는 것인데, 그렇게 고집을 부릴 이유가 있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저렇게 꽉 막혔는가? 도대체가 말이 안 통하는 작자로군!” 모르드개의 신앙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바사 사람들은 이렇게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하만을 무시했기 때문에 절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양심을 정직하게 지킨 것뿐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대다수의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은 신사참배의 문제 앞에 타협했습니다.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는 종교행사가 아니라 국가의식이라는 그럴싸한 선전에 자신을 감추었습니다. 일제는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정책에 일부 교회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저항하자 무력으로 탄압한 것입니다.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황국신민으로서 일본을 향해 절하는 것이 자명한 우상숭배인 것을 깨달아 알고 있었습니다. 모르드개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청교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성찬시 무릎을 꿇고 받는 것, 성체와 제단 앞에서 꿇어 절하는 것, 성인들의 상 앞에서 무릎 꿇는 행위를 거부했습니다. 그것이 중세 사제주의에서 나온 그릇된 미신인 것을 바르게 분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을 법으로 제정하여 강요했기 때문에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양심상 거리끼는 행동을 강요하는 것에 저항한 것입니다. 루터가 보름스 회의에서 말한 것처럼, 양심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닙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애굽기 20:5)

하만은 비겁합니다. 모르드개에게 화가 났으면 그와 개인적으로 해결을 보면 될 일입니다. 모르드개를 불러 사유를 묻던지, 합당하게 개인적인 처벌을 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그는 적의를 키워 유대인 전체를 없애려 합니다. 그는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왕에게 교묘히 말합니다.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않는 민족을 “유대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 민족”이라고 칭하며 능청스럽게 넘어갑니다. 과거에 패권을 장악했던 고레스 왕, 다리오 왕, 아닥사스다 왕이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푼 기록이 남아있기에 정확한 정보를 숨기며 얼버무리는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출 21:24)라는 율법은 하나님의 잔혹함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정확한 벌은 공의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피해를 본 사람은 죽음으로 갚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속성입니다. 하만에게 손가락질하기 전에 내 자신을 봅시다. 형제와의 문제를 개인적으로 풀지 않고, 확대해석하며 보복의 감정을 품고 있다면 나는 하만과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자연인에게 있는 하만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을 믿을 때,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 마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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