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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3일, 어윤희(魚允姬, 1878-1961) 체포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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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3월 3일 “자, 실컷 보시오.”

오늘은 어윤희(魚允姬, 1878-1961)가 잡혀간 날입니다. 1919년 3월 3일, 마흔 살의 독립 운동가는 당당히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어윤희는 12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6살에 남편을 잃었으며, 19살에는 부친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황해도 지역을 10여 년 동안 전전하다가 개성에 정착한 그녀의 삶은 복음으로 인해 변화되었습니다. 1909년 6월에 갬블(Gamble, Rev. 甘保利)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어윤희는 미리흠(美理欽)여학교, 호수돈(好壽敦)여학교를 졸업한 후 남감리회 전도부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녀는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선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연행하러 온 형사들에게 “당신들이 내 몸을 묶어 갈망정 내 마음은 못 묶어 가리라”하며 당당하게 따라나섰다……남성 경찰들에게 여성 피의자들은 조사 대상이 아니라 성희롱과 성폭력 대상이었다. 나체로 만들어 심문하는 것쯤은 보통이고 옷을 벗긴 채 짐승처럼 기어 다니게 하고, 그것을 보면서 희롱하고 끌어다가 때리고 불로 지졌다. 특히 어윤희는 개성 만세 시위를 촉발시킨 주요 인물이었기 때문에 경찰의 고문과 악형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서울로 압송되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던 중 고분고분 대답을 하지 않는다며 검사가 호통을 쳤다. “저 앙큼한 년 봐라. 다 아는 거짓말을 하는구나. 저년 발가벗겨라.” 그러나 어윤희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내 몸에 누가 손을 대. 발가벗은 내 몸뚱이 보기가 그렇게 소원이거든 내 손으로 직접 옷을 벗겠다.” 하며 옷을 훌훌 벗었다……“자, 실컷 보시오. 당신 어머니도 나 같을 게고, 당신 부인도 나 같은 거요” 하고 소리를 지르니 오히려 검사가 당황하여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어서 옷을 입히고 데리고 나가라”고 하였다. 이렇게 전혀 기를 굽히지 않은 어윤희에게 경성지방법원은 징역1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의 평균 형량을 여성의 몸으로 받은 셈이다.[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 (서울: 홍성사, 2007), 259-60.]

형무소에서 금요일 아침마다 금식했던 어윤희는 자기 밥을 유관순에게 주었습니다. 잡곡으로 뭉쳐진 밥덩어리였지만 유관순은 어씨 아주머니에게 받는 사랑을 기뻐하며 식기도를 올렸습니다. 부모와 남편을 잃고 소망 없이 살았던 어윤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 의미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가장 기구했을 여인의 인생은 기쁘게 고난을 감내하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도 복음은 이렇게 역사합니다. 기가 막힌 역전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자족의 비결을 알려주고, 고난 중에 노래하게 합니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어윤희는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16살에 결혼, 3일 만에 남편이 동학혁명군으로 나가 왜병과 싸우다 전사하여 청상과부가 되었다. 고향을 떠나 개성에 거주하면서 34살의 나이에 미리흠 여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는 한편, 기독교의 전도사 역할을 하면서 3·1 만세운동에 적극 나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어윤희는……서대문감옥 8호 감방에 수감되었다. 이 감방에는 유관순, 권애라, 신관빈, 수원 기생인 김향화, 맹아학교의 심명철 등이 있었다. 출감 후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된 밀사들에게 자금과 육혈포 등을 구해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해방 후에는 고아들을 돌보는 백의의 천사가 되었다.[김삼웅,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일제시대편)』 (파주: 나남, 2000), 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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