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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에스더 9장 “하나님의 이름도, 기적도 찾아볼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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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에스더 9장 “하나님의 이름도, 기적도 찾아볼 수 없지만”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에스더 9:22)

아하수에로는 에스더의 부탁을 들어주기 원합니다. 하지만 이미 왕의 이름으로 반포된 조서는 결코 변개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법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법률을 시행하여 이전의 것을 제재해야 합니다. 왕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생명을 보호할 수 있도록 새로운 어명을 하달하였습니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도륙의 위험에서 건짐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떠난 교만한 죄인은 반드시 죽음과 형벌 속에 떨어져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없던 걸로 하자.”라고 말씀하시며 대충 손을 터실 수 없습니다. 죄에 합당한 형벌이 내려져야 합니다. 새로운 왕명이 필요합니다. 그 왕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입니다. 이제까지 위태롭게 지내던 죄인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안전을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변개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수난당하시고 죽음을 경험하신 그리스도는 얼마나 귀한 분인지요.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사무엘상 15:29)

우리는 에스더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특별한 기적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배후에서 역사하시고 통치하시는 주님의 손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시어 자연법칙 안에서도 얼마든지 능력을 발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혼탁한 눈을 여소서. 일상 속에서 고요히, 그러나 강력히 다스리시는 주님을 보게 하옵소서.

하만은 그 자신의 뜻에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아하수에로도 자기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했으며, 에스더도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그 어떤 개입이나, 강요나 강제력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이나 책임은 각자의 죄인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자유의사를 가지고 행동했기 때문입니다……어떤 사람은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가 뒷받침해 주는 것보다 그들 자신에 대해서, 더욱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형제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자유로운 대리인(agent)을 부정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려움을 제기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예정되어진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매듭을 잘라 버립니다. 나는 어려움을 제거해 버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눈을 감아 버리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자유로운 대리인과 예정론(豫定論: doctrine of predestination)이 둘 다 사실이라고 믿습니다……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것 가운데서 자유로운 대리인이 되며,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집니다……그러나 만물을 지배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그들의 죄에 연루되지 아니하시고도, 악인들의 행동을 이용하여 자기의 거룩하고도 의로운 목적을 촉진시킬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진리들을 믿으십시오.[C. H. Spurgeon, 『스펄전 설교전집: 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욥기(상)』 (대구: 보문, 2001), 2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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