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3일 “조국의 장래를 위해 기도실에서 흘리는 눈물 ”
오늘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金瑪利亞)가 별세한 날입니다. 1944년 3월 13일 새벽, 김마리아는 평양 기홀병원에서 고요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녀는 1923년 6월에 도미(渡美)하여 파크대학, 미주리대학교, 시카고대학원대학교, 콜롬비아대학원대학교, 뉴욕신학교(New York Biblical Seminary)에서 공부한 후 귀국하여 원산 마르다윌슨 여자신학교에서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1919년 독립운동 가담 죄로 체포되었을 때 받은 고문은 그녀의 뼈 속을 고름으로 채웠고, 정신이상을 일으켰습니다. 연동학교에서 공부하며 나라사랑을 키운 김마리아는 일본에서 만든 2·8 독립선언서를 옷 속에 숨겨 국내로 반입할 만큼 담대한 여성이었습니다.
김마리아는 자신의 모교이자 둘째 언니 미렴이 사감으로 있던 정신여학교로 옮겼다. 둘은 서로 의지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김마리아는 동료 교사와 학생들의 눈에 이미 애국과 독립 사상으로 무장한……교사로 비치기 시작했다. 일제의 합방과 기독교 민족주의 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조작극 ‘105인 사건’을 경험한 이후에 그의 강의는 통곡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동료 교사 유각경의 회고다. “그분은 참으로 열심이었어요. 공부에도 생활에도 그처럼 열심일 수가 없었어요.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기도실에 들어가 조국의 장래를 위해 눈물 흘리는 것을 나는 몇 번이나 보았습니다. 나와 같이 있으면 항상 하는 얘기가 조국의 독립이었어요. 마리아의 비분강개를 듣노라면 나도 가슴 속으로 뿜어 오르는 분노나 울분에 덩달아 울었지요.”[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 (서울: 홍성사, 2007), 212-13.]
일본 경찰은 견디기 힘든 고문을 김마리아에게 가했습니다. 탈의를 시켜 천장에 매단 채로 뭇매를 때렸습니다. 출옥한 이후에도 김마리아는 중국과 미국에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우리가 그녀가 열정적으로 광복을 꿈꾸었을 뿐 아니라, 신앙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성도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김마리아가 미국에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의 집 종살이, 간호사, 물건판매, 요리사 등으로 일하며 독신의 몸으로 고생한 일도 무감각하게 넘겨들어서도 안되겠습니다. 그녀는 고문의 후유증을 가진 채로 외로움을 이겨내야 했던 한국의 딸이요, 한국교회의 지체였던 것입니다. 김마리아는 참된 신앙과 애국을 별개로 볼 수 없었습니다. 주께서 주신 자유에 감사하고 있는지, 성경적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김마리아를 고통케 하는 병증세들은 순전히 고문과 열악한 감옥생활에서 기인되어 발병한 것들로서, 정신이상증조차 보이는 심한 신경쇠약증, 깜짝깜짝 놀라는 심장병, 귀와 코 그리고 양미간에 고름이 괴는 상악골염증과 매스토이병 등이다. 3·1운동 직후 체포되어……고문으로 생긴……병은 치료되지 못한 채로 다시 2차 검거를 당하였고, 1차 때보다 더욱 혹독한 고문을 받아 병세가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도저히 나을 가망이 없었다. 염증의 악화로 인하여 연이은 고열로 음식을 먹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보석후 2주간이나 치료를 받았으나 김마리아는 여전히 혼자 걷지도 앉지도 못하는 폐인의 형상이었다.[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한국민족운동과 민족문제』 (서울: 국학자료원), 2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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