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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3월 14일,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홀튼(Lillias S. Horton, 1851-1921)의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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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4일 “언더우드 부부의 결혼식”

오늘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홀튼(Lillias S. Horton, 1851-1921)이 결혼식을 올린 날입니다. 1889년 3월 14일, 30세의 신랑과 38세의 신부는 한 몸이 되었습니다.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였던 홀튼은 명성황후의 시의(侍醫)로 일하고 있었고, 언더우드는 첫 내한 목사선교사로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치러진 외국인들의 결혼식은 조정을 대표하는 귀빈들과 하객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신혼여행과 선교여행을 겸했습니다. 2달간 북쪽 국경지대까지 여행하던 언더우드 부부는 의주에서 100여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세례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국내에서 세례를 주는 행위를 금하고 있었으므로, 언더우드는 중국 통행증을 가지고 압록강을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한국이 아닌 중국 땅에서 합법적으로 30여명의 한국인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1888년 가을, 언더우드와 필자는 약혼하였다. 사실 언더우드는 미국을 떠나기 전에 다른 여자와 약혼했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선교에 대한 관심도……약혼자에 대한 존경심도 없었으며……영감을 주는 위대한 삶에 대한 이상도 없었다. 삶을 통해 그녀는 외국 개척 선교사의 삶에서 일어나는 값진 곤경과 대면할 수 있었음도 불구하고, 약혼자와 함께 가는 것을 거절하였다……만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희생하고자 하는 욕구와 위험과 곤경, 죽음 가운데서도……영광된 주님에게 매혹되는 마음과 또한 좋은 처지에서 뿐만 아니라 나쁜 처지에서도 돌보아야 할 남편과……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그를 이 세상 끝까지 아니 이 세상 넘어서는 곳까지라도……따를 마음이 없다면, 결정은 빠를수록 좋다……나 자신은 언더우드를 보기 전에 이미 선교에 뛰어든 몸이기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더 이상 희생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Lillias H. Underwood, Underwood of Korea, 이만열 역, 『언더우드』 (서울: 기독교문사, 1990), 91-92.]

외국인들의 여행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언더우드 부부의 사생활은 쉽게 노출이 되었습니다. 구경꾼들은 그들의 묵고 있던 숙소 방문의 창호지를 손가락으로 뚫어 훔쳐보곤 했던 것입니다. 신혼여행 기간 중, 선교사 부부는 술 취한 패거리의 행패로 곤란을 겪기도 했고, 호랑이가 나오는 길을 밤에 지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연상의 신부는 남편의 결정을 존중했고,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동방의 은자의 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고했던 파란 눈의 선교사들의 헌신을 잊지 맙시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세워주신 내 자리에서 충실히 살기 원합니다.

홀튼은 모든 꽃 중에서 순백색 인동넝쿨꽃을 가장 좋아했는데 언더우드는 이것을 알고 이 꽃을 홀튼의 집에다 배달하곤 했다. 결국 이 두 사람은……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명성황후는 선물로 현금 1백만 냥을 망아지에 실어서 보내기도 하였다. 결혼식 다음날 새벽 언더우드와 홀튼은 9주간의 예정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그 장소는 압록강 내륙 지역이었다……언더우드는 신혼여행 동안 한문으로 된 전도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홀튼은 환자를 치료해 주었다. 그녀의 치료를 받은 사람은 6백 명이 넘었다고 한다.[박명수, 『잊을 수 없는 신앙선배들의 이야기』 (서울: 국민일보, 200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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