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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년 3월 15일,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Kaspar Olevianus or Caspar Olevian, 1536-1587)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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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5일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

오늘은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Kaspar Olevianus or Caspar Olevian, 1536-1587)가 별세한 날입니다. 1587년 3월 15일, 올레비아누스는 헤르본 시(Herborn in Hessen)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마지막을 위해 모인 사람들 중 하나가 물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친 것처럼, 당신의 구원을 의심 없이 확신하십니까?” 51세의 설교자는 대답했습니다. “확신하고말고요(Certissimus, Most certain).” 팔츠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할 때 우르시누스(Zacharius Ursinus)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올레비아누스의 협력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팔츠의 교회법을 작성하였고, 성신교회에서 설교자로 봉사하며 개혁자로 봉사할 수 있었던 데에는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역량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트리에르(Trier)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올레비아누스를 위해 거액의 몸값을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설교자를 하이델베르크에 데려가 지혜의 대학의 교사로 세웠습니다.

대학 생활 중에 헤르만 루트비히라는 친구를 사귀었는데, 어느 날 강에서 이 친구가 탄 보트가 뒤집힌 것을 보았습니다. 올레비아누스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강물에 뛰어들었지만 그도 곧 위험에 처하고 말았습니다……루트비히의 시종은 두 사람 중에서 올레비아누스를 자신의 주인으로 착각해서 구해냈고, 정작 헤르만 루트비히는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 올레비아누스는 평생 설교를 하며 살겠노라고 하나님께 서원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훗날 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헤르만 루트비히는 다름 아닌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이었고, 이때 프리드리히 3세가 올레비아누스를 눈여겨 본 까닭입니다.[이성호, 『특강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상)』 (안산: 흑곰북스, 2013), 132.]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개혁신앙을 갖게 된 올레비아누스는 21세에 법학박사학위을 받은 후 제네바와 취리히에서 신학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는 공부를 마친 후 메스로 가서 개혁운동을 하려 했지만, 파렐(William Farel)의 저지를 받았습니다. 파렐은 올레비아누스가 그의 고향 트리에르로 돌아가 그곳에서 개혁 운동할 것을 권했습니다. 파렐의 단호함은 제네바에서의 사역을 주저했던 칼빈을 설득했을 때만큼 강렬하게 올레비아누스의 가슴을 때렸습니다. 결국 트리에르 행을 결정한 올레비아누스는 그곳에서 프리드리히를 만나게 됩니다. 올레비아누스는 설교금지와 추방 등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은 성도였습니다. 그의 숨결이 담겨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8문을 묵상하며, 곤란 중에도 선하게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28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과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통치되어진다는 것을 알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답: 우리가 어떠한 재난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고, 번영 속에서는 감사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해서는 신실한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할 수 있는 확신이 생기며,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조금도 움직일 수 없도록 그분의 장중에 있기 때문입니다.[G. I. Williamson, The Heidelberg Catechism: A Study Guide, 이길호 역,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 (서울: 베다니, 2011),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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