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본카테고리

461년 3월 17일, 선교사 패트릭(Saint Patrick) 별세

반응형

 3월 17일 “선교사 패트릭(Saint Patrick)”

오늘은 아일랜드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으로 알려진 패트릭(Saint Patrick)이 별세한 날입니다. 461년 3월 17일,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패트릭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날은 성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로 기념되며, 어떤 곳에서는 공휴일로 지키기도 합니다. 그는 포로생활에서 도망쳐 나와 고향으로 돌아갈 무렵 바울과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9). 소명을 받은 패트릭은 훈련을 마치고 아일랜드로 돌아갔습니다.

패트릭(Patrick)은 A.D. 389년경 영국의 어디에선가 태어났다. 그가 16세였을 때 일단의 아일랜드 약탈자들이 잉글랜드로 내려와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는데 그 속에 패트릭도 끼어있었다. 그는 아일랜드의 거친 산에서 6년간을 야만인들과 함께 목동으로 지낸 다음 프랑스로 도주하여 레린스(Lérins) 수도원의 수도승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포로로 잡혀있었던 땅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서해 바다 가까운 포클러트(Foclut) 숲 주민들의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부르짖었다. ‘우리들은 그대에게 간청한다. 거룩한 젊은이여, 어서 와서 예전처럼 우리 사이를 다시 걸어 다녀라.’”[Stephen Nei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홍치모·오만규 역, 『기독교 선교사』 (서울: 성광문화사, 1979), 65.]

패트릭은 30년 이상 선교사로서 사역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로마가톨릭에서 그를 정치적인 이유로 성인으로 받든 것을 잘 여과한다면 아일랜드 선교사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패트릭을 통해 여성 그리스도인들이 전도자로 훈련받아 봉사했는데, 그는 그들의 선물을 일체 거절했습니다. 호리(毫釐)라도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 선교사의 태도를 묵상하며 영적 긴장의 허리띠를 조이게 됩니다. 생명을 걸고 찾은 자유를 복음을 위해 사용한 패트릭의 헌신에 도전을 받습니다. “나 두려움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기호(嗜好)와 자유를 내려놓고 찬송하며 아골 골짝 빈들로 가게 하옵소서.

패트릭의 선교사로의 성공은 그가 200여 교회를 세웠고 10만 명 정도의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데서 입증된다. 그러나 그는 늘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고 그의 모든 사역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뢰하였으며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였다. 그는 고백록을 다음과 같은 간증으로 끝맺는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것은 죄인인 패트릭에 의해 아일랜드에서 쓰여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든지(못 배운 사람이라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내가 했던 이 조그만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나 자신을 드려 순종함으로써 이룩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내가 죽기 전에 고백하고 싶은 것도 바로 이런 하나님의 역사뿐입니다.”[Ruth A. Tucker, From Jerusalem to Irian Jaya: A Biographical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박해근 역, 『선교사 열전』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0), 43.]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