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일 로마서 10장 “들어야 삽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바울은 외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고 회개하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동시에 바울은 이 복된 구원의 길이 진리의 말씀을 듣는 데 있다고 강조합니다. 듣는 것! 교회는 기본적으로 말하고 듣는 공동체입니다. 스바의 여왕이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난 후 감격에 겨워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하들이여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열왕기상 10:3)
이스라엘 백성들의 복됨은 지혜로운 왕의 말을 듣는 데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복됨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있습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깁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게 됩니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명확해집니다. 구닥다리처럼 보이는 음성언어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시각적 자극에 의지하게 될 때 믿음의 창출은 어려워집니다. 성경은 복음의 내용과 함께 그 방식도 자세히 알려줍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음성을 통해 선포하고 가르치라고 말씀하신 범주를 벗어날 때 교회는 방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청각장애우들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들을 배려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원칙을 어겨가면서 영상과 자막, 비디오 클립과 빔프로젝터에 집중하는 것은 주님께서 정해놓으신 도리에 어긋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섬기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 앞에서 춤추는 것이 더 쉽습니다. 설교자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말씀을 경청하는 것보다는 스테인드글라스와 벽을 장식한 성화(聖畵)를 감상하는 것이 더 감동적일 때도 있습니다. 요리문답을 통해 교리를 배우는 것보다는 반복되는 주관적 가사를 동반한 화려한 찬양집회 속에서 황홀경에 빠지는 것이 더 은혜로운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오용(誤用)은 참된 믿음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설교자는 작가이기 이전에 선포자입니다. 죄인은 독서 이전에 설교를 통해 믿음을 가집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이 바로 말로 전달되는 진리임을 알려줍니다. 들어야 삽니다.
문 65. 우리가 믿음으로써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은덕(恩德)에 참여하게 된다면,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답. 성령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복음의 선포로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시며, 성례를 사용하셔서 그것을 굳세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거룩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할 때에나 그 말씀을 들을 때에, 전하는 자가 듣는 자 모두가 다 성령님이 이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시기를 기원하며 기대하고 그 작업에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가지고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그 말씀대로 믿음을 일으키시고,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에 따라 생각을 바꾸시고 정서적 요소와 행동까지도 바뀌는 일을 하시기를 우리는 항상 기원하고 기대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말씀을 은혜의 방도로 사용하시기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승구,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강해 Ⅱ』 (서울: 이레서원, 2009),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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