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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3년 3월 22일,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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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2일 “어거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오늘은 어거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가 태어난 날입니다. 1663년 3월 22일, 프랑케는 뤼벡(Lübeck)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출생했습니다. 그는 1687년 뤼네부르크(Lüneburg)에서 회심을 경험한 이후 무신론적인 의혹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회심 후 프랑케는 자선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요리문답을 가르쳤고, 슈페너와 긴밀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프랑케의 기여점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교육과 선교라는 측면이다. 첫째, 교육적인 측면에서 그는 어린이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졌는데, 그가 고아원을 창설한 것도 이런 그의 관심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의 할레 경건주의 운동은 1529년에 ‘대소교리문답’을 통하여 어린이들을 교육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교육은 얼마 지나지 않아 널리 보급되었는데 그는 교육에서 신분의 차이를 극복함으로써 교육의 기회를 균등히 했다. 그의 교육의 특징은 외국어와 이론과 실기를 병행하는 실용적인 교육이었으며, 오늘날 독일인의 특성이 된 시간과 돈에 대한 절약정신을 심어주었고, 피교육자 자신의 회심을 강조한 데 있었다. 또한 개인과 단체들에 의한 집중적 성경연구와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새로운 강조와 함께 신자들의 더 많은 참여, 매일의 삶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에 대한 증거, 그리고 기도, 도덕적 삶, 사랑의 행위 등을 통한 전도를 강조한다.[안승오, 『한 권으로 읽는 세계 선교 역사 100장면 』 (서울: 평단문화사, 2010), 206-207.]

프랑케는 가난한 이들을 자신의 집에 들인 후, 루터의 요리문답을 설명하고 기도해 준 다음 음식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가 경건주의 지도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신비적인 경건을 추구하거나 탈세상적인 수도원주의를 지향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케는 해외선교에서 크게 기여했는데, 그의 영향 하에서 플뤼챠우(Heinrich Plütschau)와 치겐발크(Bartholomäus Ziegenbalg)가 남인도로 파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성경과 요리문답, 찬송가를 번역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경건주의 운동은 화석화된 정통교회에 대한 반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이 운동에서도 여러 교리적 문제들이 불거져 나왔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교리와 실천의 통합을 추구하며 경건 함양에 힘썼던 선배를 통해 배우는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프랑케는……스페너보다 더 경건주의에 결정적 공헌을 남겼다. 그는 기본적으로 루터의 로마서 서문에 나타난 신앙 서술에 찬성하였으나, 보다 더 영적 경험과 경건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영적 경험을 가진 뒤 라이프찌히대학에서 가르쳤는데, 그의 주석적, 경험적 강의는 그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다. 많은 학생들이 그를 좋아했고 학생들은 경건주의의 이원론적 경건생활과 영적 관심에 매료되어, 자기들의 전공과목 공부를 등한시하고 신앙생활과 선교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1694년 할레(Halle)에 경건주의 대학교인 할레대학교(University of Halle)를 설립하게 되었고, 할레시는 경건주의 운동의 센터가 되었으며, 가난한 자를 위한 학교(1695), 고아원(1696), 그리고 고등학교(1697) 등을 세웠으며, 개인의 인격적 변화를 통한 세계 변혁(The changing of the world through the changing of persons)을 강조하였다. 할레대학을 중심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선교 지망생이 되어 18, 19, 20세기 세계 선교에 수만 명의 선교사들이 이 경건주의 운동을 통해 헌신하게 되었다.[한국교회사학연구회, 『한국 기독교 사상』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98),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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