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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 『기독교 강요』2.8.38-42 이 계명에 암시되어 있는 위협, [제6계명] 이 계명의 의도 이 계명의 두 가지 근거 [제7계명] 이 계명의 목적, 독신은 특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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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위협 이밖에도 주께서는 부모를 올바로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현세의 축복을 약속하시는 동시에, 고집 세고 불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저주를 피할 수 없으리라고 암시하신다. 이 계명이 확실히 실행되도록, 주께서는 그런 자들을 모두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율법에서 선언하시고, 처벌을 명령하셨다. 그들이 이 판결을 교묘하게 피한다면,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지 벌을 주신다. 우리는 이런 자들이 많이 전쟁에서나 개인 싸움에서 죽으며, 혹은 다른 더 드문 방법으로 쓰러지는 것을 본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이 경고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고령에 이르기까지 벌을 받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는지 모르나, 그들은 현세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겨우 살아가며, 앞에는 더욱 큰 벌이 기다리고 있다. 참으로 그 때에는 경건한 자녀들에게 약속된 축복에 결코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겸해서 주의해야 한다. 우리에게 대한 명령은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 안에서"만 하라는 것이다(엡 6:1). 이 점은 이미 언급된 원칙을 보아서 명백히 알 수 있다. 부모가 앉아 있는 높은 자리는 주께서 주신 것이며, 그들에게는 주의 영광의 일부를 나눠주신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공경하는 한 걸음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율법을 어기게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부모가 아니고 우리를 참 아버지에게 순종하지 못하게 유혹하는 이방인이라고 인정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 군왕들과 귀족들과 그 밖의 각종 높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822) 그들이 윗자리에 있다고 해서 그 위세로 하나님의 존엄성을 끌어내린다는 것은 부끄럽고 어리석은 짓이다. 그들이 높은 지위를 가진 것은 하나님이 높으시기 때문이며, 그들은 마땅히 우리를 높으신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여섯째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 39. 계명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 인류 전체에 일종의 통일성이 있도록 한데 묶어 두셨으므로 우리는 각각 전체의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웃의 신체를 해할 일은 폭행, 상해 기타 어떤 것이든지 일체 금지하신다. 따라서 이웃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충실히 이용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들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라, 해로운 것이면 막아내라, 이웃이 위험한 처지에 있으면 도와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입법자로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는 이 원칙으로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마음속의 생각을 보시며 특히 그것을 중시하시는 분이 육체에만 진정한 의를 가르치신다면,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을 금하며, 형제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명령하신다. 참으로 살인은 손이 낳는 것이지만, 마음이 분노와 증오심에 감염될 때에 살인을 잉태한다. 형제에 대해서 노하면서 그를 해하려는 욕망이 치밀어 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형제에 대해 노하지 않는다면 미워할 수도 없다. 증오심은 지속되는 분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분노나 증오심이 있는 곳에는 해를 주려는 의도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수단으로도 감출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문제를 회피하려고 애쓰더라도, 성령께서는 이미 "마음속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선언하셨고(요일 3:15), 주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자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선언하셨다. 40. 이 계명이 생긴 이유 성경은 이 계명에 대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동시에 우리의 혈육이라는 이중의 근거를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침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웃을 신성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 모든 인류의 관계를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이웃의 신체를 우리의 몸같이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어떻게 이 권면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업과 은총에서 귀결되는가를 논하겠다.823) 주께서는 사람에게 자연히 있으며 우리를 인도해서 이웃 사람의 생존을 돕게 할 수 있는 두 가지 일을 우리가 숙고하기를 원한다. 그 두 가지 일이란, 사람에게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존경하며 그에게 있는 우리의 혈육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피를 흘리지 않은 것만으로는 살인죄를 피하지 못한다. 이웃의 안전에 해로운 일을 실행했거나, 시도했거나, 원했거나, 계획했다면, 그것은 살인죄로 간주된다. 또 능력과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이웃의 안전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역시 똑같이 율법에 대한 흉측한 위반이다. 그러나 이웃의 신체의 안전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이 많은즉, 영혼의 안전을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열성과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인가를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주께서 보시기에는 영혼이 육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일곱째 계명 "간음하지 말이니라"(출 20:14) 41. 일반적인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정숙과 순결을 사랑하시므로, 우리는 모든 부정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육의 추악이나 정욕의 난무에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 대응하는 적극적인 계명은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을 정결과 극기로 지속적으로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행은 모든 정욕의 귀착점이며, 육체에 그 낙인을 찍는 점에서 그 추악상은 더욱 현저히 저열한 것인데, 그 음행을 명백히 금하심으로써 주께서는 우리가 모든 정욕을 타기 하도록 인도하려 하신다. 인간이 이런 상태로 창조된 것은 고독 생활을 하지 않고 돕는 사람과 함께 즐겁게 살도록 하시려는 뜻이다(참조, 창 2:18). 사람은 죄의 저주를 받아 더욱 이렇게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책으로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시고, 그의 권위에서 출발한 결혼 생활을 축복으로 성별 하셨다. 따라서 결혼이 아닌 남녀 결합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은 것이며, 우리가 무절제한 정욕에 빠지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한 대책으로서 결혼생활이 제정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결혼하지 않은 남녀의 동거 생활은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들을 때에, 우리는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42. 독신생활은? 하나님이 특별한 은사로 놓아주신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는 모두 우리의 본성의 상태 때문에, 또 타락 이후에 타오른 정욕 때문에 이중으로 여성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각각 자기가 받은 것을 알아야 한다. 순결은 멸시하지 못할 덕성임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일시적으로 사람에 따라 혹은 거부되고 혹은 부여된다. 그러므로 정절을 지키기 어려워 이 싸움을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은 결혼에서 도움을 구하며, 그들의 부름의 정도에 따라 정조를 지켜야 한다. 이 교훈을(참조, 마 19:11)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무절제에 대해 주신 타협안을 채용하지 않는 다면, 그들은 결국 하나님에게 반항하며 그의 규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 자기는 하지 못할 일이 없노라고824) 내게 반대하는 사람이 지금 많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길을 걷는 사람들만을, 바꿔 말하면, 자기가 부르신 대로 걷는 사람들만을 도우신다(참조, 시 91:1, 14) 하나님의 도움을 무시하고 자기들에게 불가피한 일을 충족하려고 어리석고 경솔한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명에서 떠나는 것이다. 주께서는 정절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라고 확인하신다. 그것은 교회라는 몸 전체에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종류의 은사가 아니라, 소수 지체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주께서는 우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를 구별하신다(마 19:12). 즉, 그들이 천국 일에 더욱 전적으로 또 자유롭게 헌신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이렇게 고자가 되는 것을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주께서는 즉시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특히 하늘에서 "허락된" 자들뿐이라고 지적하셨다(마 19:11).그래서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고 결론하신다(마 19:12). 바울은 더 분명히 말한다.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고전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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