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렌은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의 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초등 및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1881년 오하이오 주의 웨슬리안대학교를 졸업하여 이학사의 학위를 받았다. 이어 1년 동안 콜럼버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1883년 3월 신시내티의 마이애미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그가 받은 의학교육은 이론 강의를 바탕으로 임상실습을 하는 대학교형의 교육이 아니라, 임상 실습 위주로 하고 필요에 따라 이론을 배우는 임상형, 즉 도제식 의학교육이었다.
알렌은 졸업 직전인 1883년 3월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 선교사로 지원했고 의사가 되자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어 1883년 10월 11일 중국에 도착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친교를 맺었던 서양 의사 핸더슨이 의사가 필요한 서울에 가기를 권하자 1884년 9월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도착 직후 알렌은 미국 공사관의 무급의사로 임명되었고 그 외에 외국 거류민 환자들도 돌보았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의 와중에서 알렌은 외무협판 묄렌도르프의 소개로 민영익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고종의 고마움의 표시로서 고종은 알렌에게 서울 재동에 있는 개화파 홍영식의 집을 주고 1885년 4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을 설립하게 했다. 동시에 고종의 어의로 임명받았고, 각국 공사관의 부속의사로도 임명되었다. 최초의 서양의료기관인 제중원은 알렌의 책임 하에 운영이 되었는데 이후 헤론과 여의사 엘러스 등 미국의 선교의사들이 내한하여 진료했다.
1887년 8월 조선 정부는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하기로 하고 박정양朴定陽을 초대 전권공사로, 알렌을 참찬관參贊官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알렌은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887년 10월 초 제물포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1889년 6월 참찬관을 사임하고 조선으로 다시 돌아온 알렌은 1890년 8월부터 약 반 년 동안 제중원의 책임을 다시 맡았다.
1901년 6월 21일 알렌은 주한 미국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03년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조선에 대한 정책을 두고 갈등이 있었고 을사늑약이 체결될 즈음인 1905년 3월 29일 미국공사에서 해임되었다. 왜냐하면 알렌이 너무나 친한적인 태도를 보이므로 미국 정부는 그를 거북스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알렌은 내한한 때부터 약 22년을 한국을 위해 의학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직무를 수행했다.
알렌은 1905년 6월 9일 조선을 떠나 9월 미국 오하이오 주 톨레도에 정착하였다. 1930년 알렌은 건강이 악화되어 두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고 1932년 12월 11일 향년 74세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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