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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5월 13일,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 한국이름 배위량[裵偉良]) 선교사가 딸 낸시 로즈(Nancy Rose)를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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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베어드 부부의 슬픔, 길이 함께 하소서”

오늘은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 한국이름 배위량[裵偉良]) 선교사가 딸 낸시 로즈(Nancy Rose)를 잃은 날입니다. 1894년 5월 13일, 대구지역 최초의 선교사였던 윌리엄 베어드의 딸 낸시는 뇌수막염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1891년에 내한한 베어드 부부는 1892년 7월 5일에 낸시를 낳았습니다. 낸시는 마펫(마포삼열[馬布三悅]) 선교사에게 유아세례를 받은 지 일 년 만에 부모의 곁을 떠났습니다. 태어난 지 2년도 채 못 되어 별세한 베어드의 딸은 부산 복병산 외인묘지에 묻혔습니다. 베어드는 딸을 잃은 슬픔을 “내 안의 본성은 매우 강한 반면, 은혜는 매우 약하다.”고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베어드의 아내 애니 베어드(Annie L. Baird, 1864-1916, 한국이름 안애리[安愛理])의 기도는 절절한 찬송시로 남았습니다. 통일찬송가 440장(새찬송가 387) “멀리 멀리 갔더니”는 아이를 선교지에 묻은 엄마의 가슴시린 간구입니다. 애니 베어드의 고백을 들어 봅시다. 유일한 안위는 예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1.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2. 예수 예수 내주여 섭섭하여 울 때에 눈물 씻어 주시고 나를 위로 하소서
3. 다니다가 쉴 때에 쓸쓸한 곳 만나도 홀로 있게 마시고 주여 보호하소서.
(후렴) 예수 예수 내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딸을 잃은 엄마의 탄식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나라의 형편 속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의 애환과 함께 공명했습니다. 베어드 선교사 부부는 아픔을 체험한 자로서, 고통 받는 한국인의 영혼을 복음으로 위로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하나님께서는 낸시를 잃은 지 5개월 만에 아들 존 애덤스를 허락하셔서 베어드 부부를 위로하셨습니다. 베어드의 두 아들(윌리엄 베어드 2세, 리처드 베어드)은 한국선교사로 일한 후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베어드는 대구 지부를 개척한 후 평양으로 올라가, 그곳에 숭실학당(현 숭실대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베어드가 상실 속에서도 믿음을 꺾지 않고 개척선교의 길을 가게 했습니다. 인내케 하시는 성령님의 만지심이 내 삶에도 있기를 기도합니다.

베어드는 1891년 29세의 나이로 입국한 이래로 32세가 되는 1895년까지 만 4년간 부산에서 사역하였다. 그가 부산에서 일한 4년간은 부산에서의 북장로교 선교활동의 시원이 되며 부산지방 기독교운동의 기원이 된다. 부사에서만이 아니라 그 후의 한국에서의 활동에서 보여준 1880년대 멕코믹 신학교의 복음주의적 선교열정과 엄격한 언약파적 장로교 전통은 그의 신앙과 삶, 그리고 선교사역을 이끌어 갔던 신학적 동인이었다. 베어드의 부산에서의 선교활동은……호주 선교사들과 함께 부산경남지방 기독교 형성에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북장로교 선교부를 볼 때 베어드가 부산지부를 개척하고 그 기초를 세웠기에 북장로교 선교부가 부산에서 철수하게 되는 1914년까지 23년간 21명의 선교사들이 부산에서 활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이상규, “윌리엄 베어드의 부산에서의 활동”, 『부산의 첫 선교사들』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7),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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