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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 5월 23일, 기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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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상황을 다루는 설교가”

오늘은 기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가 별세한 날입니다. 1498년 5월 23일, 더 이상 회복될 수 없을 만큼 고문당한 사보나롤라는 사형을 언도받아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순교자 사보나롤라의 시신은 불태워진 후 아르노(Arno) 강에 뿌려졌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가 사보나롤라가 이런 혹독한 시련을 당한 이유는 이단으로 정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보나롤라는 신정 정치적 민주제 실시와 귀족정치 배격에 앞장섰고, 종교개혁을 위한 법률제정에도 힘썼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아라비아티 가문(Arrabiati)은 그를 지지했던 프랑스와 사보나롤라 사이를 이간시켰습니다. 사보나롤라는 1497년에 출교 당했으나 결코 설교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교황은 사보나롤라가 계속 설교하며 개혁운동을 진행한다면 플로렌스 지방을 파문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두려움에 떤 피렌체 사람들은 사보나롤라를 외면했고, 그의 제자 한 사람은 스승을 모함했습니다. 이로써 깨끗한 도시로 변모해가던 플로렌스의 개혁운동은 중단되었습니다.

1482년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에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1491년 성 마가 수도원의 원장이 되면서 개혁운동의 바람을 일으켰다. 그의 교회 개혁운동은 피렌체 시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당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메디치(Medici) 가(家)에 큰 타격을 주었다. 사보나롤라가 당시의 정치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과감하게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교황은 이때에 사보나롤라의 개혁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나, 사보나롤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추기경의 모자를 받지 않겠소. 그 대신 나의 붉은 피로 물들인 순교자의 모자를 쓸 것이오.” 그리고 교황을 향하여, “교황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직을 매매하는 자이며, 무신론자이며 그 밖의 여러 가지 죄를 범한 자이다.”라고 교화의 타락을 공격하였다.[김의환, 『기독교회사』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4), 248.]

전례 없는 타락의 시대에 출현한 도미니크 수사 사보나롤라는 광야에서 외치는 고독한 소리였습니다. 플로렌스의 설교자 사보나롤라는 성직매매와 권력, 주색잡기에 탐닉하던 교황과 맞섰습니다. 무자비하고 세속적인 종교권력은 그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지만, 진리 위해 용감히 일어선 사보나롤라의 정신은 지금도 살아 기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시대 이전에도 작은 불꽃들을 보내시어 빛을 비추게 하셨습니다. 시대를 분별합시다. 목소리를 낮추지 맙시다. 주여, 성령 안에서 진리의 시각으로 오늘을 해석할 수 있는 눈을 주소서.

그는……성경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를 일관하지 않았다. 그의 설교는 항상 상황을 다루고 있었으며,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성경 본문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철학서적을 섭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는 성경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성경 해석은 엄격하게 말해서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적인 성경 해석을 따르고 있지 않았다. 때로는 환상에 가득 찼으며, 어떤 때는 너무 극단적이었고, 어떤 때는 철학적인 사색과 알레고리컬(allegorical)한 방법을 취한 것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성경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이다.[김남준,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서울: 솔로몬, 2007),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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