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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6월 4일, 브루스 헌트(Bruce Finley Hunt, 1903-1992, 한국 이름 한부선)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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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한부선, 의장! 불법이오! 항의합니다!”

오늘은 브루스 헌트(Bruce Finley Hunt, 1903-1992, 한국 이름 한부선)가 태어난 날입니다. 1903년 6월 4일, 한위렴 선교사의 장남 한부선은 평양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1919년에 도미하여 휘튼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선교사로 자원하여 한국으로 파송을 받습니다. 하지만 1938년에 열린 조선예수교 장로교 총회에 참석한 한부선은 일본 형사의 엎어치기로 회의장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끌려 나오게 되었습니다. 총회장이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는 우상숭배가 아니요 국민의례임을 가결시킨 것에 대해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외침이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의장, 불법이오. 항의합니다!” 한부선은 1941년 10월에 체포되기 전까지 만주 할빈시를 중심으로 한국교회를 돌보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강제 추방당하였으나 1946년, 해방된 한국 땅에 다시 돌아와 우리말로 유창하게 강의하며 후학을 양성하였습니다.

한부선은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삼일운동의 충격적인 장면들을 목격했는데 그것은 그의 일생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던 군중을 목격했다. 도망치는 한국 군중을 일본군이 총검으로 난도질했다……수천 명이 감옥으로 끌려가고 고문을 당하며 죽어갔다. 그때부터 나는 일제가 강압적으로 한국인들을 흡수 동화시키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한부선은 태극기를 액자에 넣어 자신의 방에 걸어 둘 정도로 평생 “한국산” 미국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920년, 한부선은 위튼 대학(Wheaton College)에 입학했다……한국에서는 외모로 인해, 미국에서는 문화와 관습으로 인해 그는 어디에 가든 자신을 이방인처럼 느낄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대학 2학년 때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위해 기도하던 그는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위튼 대학의 전도 집회에서 “비로소 진정으로 거듭남을 체험”한 그는 자신의 일생을 주님께 헌신했다.[양낙흥, 『한국장로교회사』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8), 350-51.]

한부선이 봉천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그의 어린 딸 메리는 아빠의 소재를 묻는 질문에 “아빠는 예수님을 위해 감옥에 계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진리가 타협되고 있을 때 두려움을 이겨내고 항거한 한부선의 정신이 절실히 요청되는 때입니다. 사회와 교회 모두 과거사를 말끔히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의로운 삶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한부선이 1935년에 안식년을 가지기 위해 귀국했을 그 때 자신을 파견한 북장로교회가 성경의 절대 무오성을 믿지 않고, 진화론을 수용하는 신신학을 용납하는 교회가 된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메리카장로교회로 소속을 옮겼다. 귀환하여 충청 지역에서 선교를 하다가, 만주 지역으로 옮겨 사역을 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 시행안을 결의할 때,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가”만 묻고 “부”는 묻지 않자, 당당히 일어나서 “항의합니다.”, 또 “화장, 규칙이오.”하고 항거한 사람이 있었다. 한부선 선교사였다. 왜경에게 끌려가면서도……한부선은 일제의 종교정책과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여 항거하다가 1940년 10월에 검속되었다……한부선은 1941년 6월에 미일 포로 교환 협상에 따라 아프리카를 거쳐 미국에 건너갔다.[최덕성,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0), 4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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