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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 6월 9일,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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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윌리엄 캐리,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한 선교사”


오늘은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가 73세의 나이로 별세한 날입니다. 1834년 6월 9일, 근대 선교의 아버지 캐리는 인도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한 친구에게 이렇게 부탁하였습니다. “내가 죽었을 때, 캐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게나. 단지 캐리의 구세주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주시게.” 그의 유언장에는 선교 기지였던 세람포 부지와 모든 중대한 부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캐리의 묘비에 새겨진 고백을 들어봅시다. “윌리엄 캐리……가엾고, 불쌍하고, 무력한 벌레 같은 인간, 당신의 친절한 팔에 안기나이다.”

1763년부터 실질적으로 인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영국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였다……유일한 목표는 경제적 수익이었다……대표들은 “우리들의 영토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미친 짓이며, 가장 낭비이며,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미치광이 광신자들의 헛소리이다. 이러한 계획은 죄악이며, 어리석고, 해롭고, 위험하고, 유익도 실현성도 없는 것이다.”고 평가했다……캐리와 그 동료들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힌두교를 연구했다……이러한 지식이 있어야 청중들을 이해하고 자신 있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구속을 받아야 하는 대상은 단지 개인들의 육체와 영혼들뿐만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비기독교 국가의 사상 체계 자체도 그리스도에 사로잡히고 복종해야 할 영역의 일부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1824년 캐리는 성경 전체를 6개 언어로, 성경 일부를 24개 언어로 번역하였으며, 동양 언어들을 위한 각종 문법책들, 사전들과 아울러 동양서적들을 번역 출판했다.[Bruce L. Shelly, Church History In Plain Language, 박희석 역, 『현대인을 위한 교회사』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75.]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한 캐리는 어떤 일을 직접 시도하고 끈기 있게 해 보기 전까지는 자신의 능력을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구두장이 선교사가 학자나 부자보다 많은 일을 선교지에서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이 원리를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게으름과 나태를 버립시다. 나의 최선으로 주님을 섬깁시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많은 인도 여인이 두 명의 아이가 생기면 ‘신성한 갠지스 강’에 한 아이를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풍습이 있었다……아이는 익사하거나 악어 떼의 먹이가 되곤 했다……인간을 이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장면을 본 그는 총독에게 이 풍습의 심각성을 알렸다……캐리는 즉시 철저한 조사를 해 보고서를 올렸다……1804년, 유아 살해 풍습이 금지되었다. 그는 또 다른 비인간적인 악습에 관심을 기울였다……늙고 병든 가족을 갠지스 강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에 방치해 죽게 하는 풍습이었다……많은 한센병 환자가 화형되거나 물에 던져져 죽임을 당했다. 어떤 이들은 생매장되기도 했다. 그는 대안으로 한센병 환자 요양소를 세우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한 ‘사티’를 근절시키는 일에도 앞장섰다……‘사티’는 죽은 남편을 화장할 때 미망인도 함께 화장하는 풍습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인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으며 남은 가족이 축복을 받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은 젊은 과부라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였다.[Paul Pease, Travel with William Carey, 송용자 역, 『윌리엄 케리와 떠나는 여행』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6), 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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