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2일 “웨스트민스터 총회 결의, 즐거이 배우고 가르쳐야 할 신앙고백”
오늘은 영국 의회가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개최를 결의한 날입니다. 1643년 6월 12일, 영국의 의회는 교회의 정치형태와 예배를 정착시키고, 잘못된 교훈과 해석으로부터 교리를 정화하며 옹호하기 위해 교회회의를 개최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의회는 상․하원에서 파송한 30명의 의원과 영국전역의 경건한 목회자·신학자 121명으로 총회를 구성했습니다. 1643년 7월에 열린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는 5년 6개월간의 논의와 분과별 토론 끝에 공적예배 지침서,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 등을 작성했습니다. 총대들은 매주 월요일마다 성경에 합치된 교리와 교회의 유익,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서약하며 천백여 번의 회의를 소화해 냈습니다. 내란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열렸다. 청교도 중심의 의회는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적 전통이 왕에 의해 위협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앙을 확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의회는 찰스 1세의 반대와 위협에도 불구하고……웨스트민스터 총회를 개최했다. 참석자는 상원에서 10명, 하원에서 20명, 전국에서 뽑힌 121명의 신학자와 목회자로 구성되었다. 구성원 대부분이 장로교도였다. 의회는 1643년 9월에 스코틀랜드의 도움을 얻기 위해 ‘엄숙한 동맹과 계약’을 체결했고, 스코틀랜드 대표단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초청됐다. 총회는 처음에 〈39개 신조〉를 수정하려 했다. 그러나 수정보다는 전면적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아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기로 결의했다. 총회는 1644년 8월에 신앙고백서 작성위원회를 조직했고, 1646년 11월에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의회에 제출했다……이 신앙고백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의회의 승인을 받았고, 이후 스코틀랜드와 미국 장로교회의 표준 문서가 되었다……이 신앙고백서는 잉글랜드 왕에 대한 의회의 저항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기도 했다.[이동희, 『역사를 바꾼 종교개혁가들』 (서울: 지식의 숲, 2013), 290-92.]
당시 영국은 혼란기였음을 기억합시다. 찰스 1세는 전쟁 자금 확보를 위해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했고, 의회는 선박세를 비롯한 조세정책과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대해 항의했습니다. 왕당파와 의회파 군대가 전투를 벌이는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총회의 문서들은 보편교회를 위한 복된 봉사였습니다. 정치적 혼돈 속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보여준 의지에 감사를 표합시다. 임직 때 이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받는다는 고백이 하나님과 양심을 기만하는 일이 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합시다. 이 신앙고백에 드러난 교리들을 즐거이 배우고 가르칩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회중교회와 침례교회의 신앙고백서 작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매사추세츠의 회중교회 노회는 일찍이 1648년에 본 신앙고백의 교회 정치에 관한 조항을 수정하여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였다. 한국에서는 1907년 독노회가 최초로 조직되어 개최되었을 때, 「12신조」를 조선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는 한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 소신앙교육문답(요리문답)은 신앙의 지침을 위하여 참고하도록 하고 그것을 신앙고백서로 채택하는 문제는 훗날의 일로 미루었다. 그런 것을 1965년에 합동 측 장로교단이, 그리고 1972년에는 고신 측 장로교단이 각기 본 고백서를 교회의 신앙고백서로 채택하였다.[김영재 편저, 『기독교 신앙고백』 (수원: 영음사, 2011), 1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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