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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6월 20일, 이기풍(李基豊, 1868-1942)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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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일 “이기풍, 형무소에서 순교한다면 이에 더 큰 영광이 없다.”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목사 7인 중 한 명인 이기풍(李基豊, 1868-1942)이 별세한 날입니다. 고문 후 후유증으로 인해 병보석으로 출감한 지 2개월 여 만인 1942년 6월 20일, 75세의 노목사는 여천군 남면 우학리교회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기풍이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것은 신사참배 거부 때문이었습니다. 평양에서 태어나 박치기와 돌팔매로 이름을 날리던 이기풍은 믿음을 가지게 된 후 스왈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마포삼열의 조사로 일하다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서는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 받게 됩니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발을 내딛었을 당시에는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을 때였다. 1901년 5월에 일어난 신축교난(辛丑敎難) 때문이었다. 제주도 대정군(大靜郡)에서 천주교를 이용하여 잡세를 수탈했다는 이유로 민란이 일어나 가톨릭교도 7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었다. 이 문제는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하려던 프랑스와의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됐었다. 이런 사건이 있던 터라 제주도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은 가혹하리만큼 심했다. 이기풍 목사는 주민들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위협을 당했다. 그런가 하면 굶주림과 병마에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야 했다. 그런 어둠의 땅에서도 이기풍 목사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복음 전파에 안간힘을 다했다. 그 후 얼마가 지나서 총회의 파견에 따라 김홍련과 이관선이라는 전도인이 제주도에 오자 선교 활동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제주도 주민들에게 온갖 박해와 방해를 받았지만 성내를 비롯하여 삼양, 내도, 모슬포, 중문 등 무려 열다섯 군데에 교회를 세웠다.[차종순, “이기풍 목사의 목회 리더십”, 『장로교 최초 목사 7인 리더십』 (서울: 쿰란출판사, 2010), 187-88.]

은퇴를 생각할 나이인 60대 후반에 이기풍 목사는 호남의 섬지역을 오가며 왕성히 전도하였습니다. 한때 사역을 감당하던 중 앓았던 귓병과 관절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증상 등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총회장 출신의 초대교역자는 연약함에 굴복하지 않고 복음 들고 낮은 곳을 찾아 다녔고, 순교를 소원했습니다. 나도 이런 복된 모범을 남길 수 있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5학년 때……신사에 가서 참배하는 행사가 있었다. 나는 급장의 책임으로 할 수 없이 맨 앞줄에 설 수밖에 없었다. “신사에 대하여 경례.” 일본인 남선생의 구령소리가 우렁차게 울리자 내 두 다리는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죽어도 절하지 마라.” 아버지의 근엄하신 음성이 내 귀를 스쳐간다……“학교를 중단하는 일이 있더라도 신사에 절하는 학교는 보낼 수 없다.”……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죄로 우리 집은 쌀 배급을 받지 못했다. 온 식구들은 감자를 먹으며 영양부족이 되어갔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입에서는 감사 찬송이 끊어질 새가 없었다. 1939년 3월에 다시 3학년으로……부산 옆에 있는 동래 일신여학교에 전학시험을 치러갔다. 전국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몰려온 목사 딸들이 18명이었다. 나는 기숙사 뒷산에 올라가 집에서 온 편지를 펴들고 땅거미가 지도록 울면서 기도하다가 내려오는 날이 많게 되었다……다음과 같은 편지 때문이었다. “사례야! 아버지는 또다시 왜경의 사슬에 묶여 경찰서로 끌려갔다. 영적으로 볼 때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른다. 아버지가 형무소에서 순교한다면 이에 더 큰 영광이 없다.”[이사례, 『이기풍 목사의 삶과 신앙』 (서울: 기독교문사, 2007), 1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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